성선경, 연밭에서
하늘이 맑은 것은 자주 울기 때문이라고
나도 눈물을 머금고 먼 하늘 우러러본다
내 젖은 발목으로
얼마나 먼 길을 돌아왔는지
진흙의 깊은 수렁 어떻게 건너왔는지
뿌리 깊은 마음의 상처들이 얼마나
큰 구멍으로 자릴 잡았는지
아는 이 누구 하나 없다고
울다 눈물 걷으며
하늘을 향해
쭉 고개를 든
붉 밝힌 연등 하나
전향, 사과는 미라처럼
사과를 깎는다
비로소
사과는 미라처럼 꽁꽁 여민 속내를
열어 보인다
나무에 매달려
하늘 속에 묻혀 있었던 그 붉은 내력을
아무일 없었다는 듯 술술 풀어 놓는다
오랜 세월
햇살과 바람과 비와 함께 뒹굴며
썩지 않고 지켜온
맑고 둥근 오기
힘들었던 기억들은 다 잊고
향기로운 언어로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각 사각 허공에 쓴다
이수익, 방울소리
청계천 7가 골동품 가게에서
나는 어느 황소 목에 걸렸던 방울을
하나 샀다
그 영롱한 소리의 방울을 딸랑거리던
소는 이미 이승의 짐승이 아니지만
나는 소를 몰고 여름 해질녘 하산하던
그날의 소년이 되어, 배고픈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마을로 터덜터덜 걸어 내려왔다
장사치들의 흥정이 떠들썩한 문명의
골목에선 지금, 삼륜차가 울려 대는 경적이
저자바닥에 따가운데
내가 몰고 가는 소의 딸랑이는 방울 소리는
돌담 너무 옥분이네 안방에
들릴까 말까
사립문 밖에 나와 날 기다리며 섰을
누나의 귀에는 들릴까 말까
천양희, 몽산포
마음이 늦게 포구에 가 닿는다
언제 내 몸 속에 들어와 흔들리는 해송들
바다에 웬 몽산(夢山)이 있냐고 중얼거린다
내가 그 근처에 머물 때는
세상을 가리켜 푸르다 하였으나
기억은 왜 기억만큼 믿을 것이 없게 하고
꿈은 또 왜 꿈으로만 끝나는가
여기까지 와서 나는 다시 몽롱해진다
생각은 때로 해변의 구석까지 붙잡기도 하고
하류로 가는 길을 지우기도 하지만
살아 있어, 깊은 물소리 듣지 못한다면
어떤 생(生)이 저 파도를 밀어가겠는가
헐렁해진 해안선이 나를 당긴다
두근거리며 나는 수평선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부풀었던 돛들, 붉은 게들 밀물처럼 빠져나가고
이제 몽산은 없다, 없으므로
갯벌조차 천천히 발자국을 거둔다
정호승, 반달
아무도 반달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반달이 보름달이 될 수 있겠는가
보름달이 반달이 되지 않는다면
사랑은 그 얼마나 오만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