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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송의 시조 무제 유유
"나뭇꾼이라도 꿈을 키우면 황제가 된다."
405년 7월 9일, 동진(東晋;317-420)의 수도인 건강(建康)은 어느때보다 활기가 넘쳐 흘렀다. 문무백관으로부터 저자거리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발걸음이 가벼웠다.
황성인 건강궁(建康宮)의 여러 건축물에는 화려한 꽃등이 걸려있고, 문루와 담벽에는 붉은 대련(對聯)이 여기저기 붙어 있어 축제를 방불케 하였다.
황성의 동쪽에 위치한 동부성(東府城), 서쪽에 자리잡은 석두성(石頭城), 남쪽의 양군성(陽郡城), 서남쪽의 서주성(西州城)도 정문이 모두 활짝 열려있고 축제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도대체 오늘의 남경(南京)인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이처럼 온통 시내가 들떠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궁금한지 물어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모른단 말이오. 오늘 황궁에서 간신 환현(桓玄)을 물리친 여러 장군들을 위로하는 잔치가 벌어진다오.”
“그럼 이제 혼란은 끝나고 태평성대가 올까요?”
“올거라 믿어요. 유유 장군 같은 충신이 어디 있겠나요?”
“이제는 그놈의 반란인가 뭔가 하는게 없었으면 좋겠수다.”
사람들은 환현(桓玄)이 3년전인 402년에 반란을 일으켜서 황제인 안제(安帝;396-418)를 내?고 초(楚)나라를 세웠다가 2년후인 404년 5월에 북부군(北府軍)의 장군인 유유(劉裕) 등에게 패하여 죽임을 당한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듬해인 3월에 환현 일당의 반란은 모두 평정되어 수도인 건강(建康)은 평온을 되찾았으며, 이 모든 공이 유유(劉裕)의 은덕임도 모를리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좋은 세상이 올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라도 미래를 볼 수는 없는 법이다. 오늘의 기쁨은 잠시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어느 누가 뒷날을 대비할수 있을까?
백성들과 대신들, 그리고 황제까지도 지난날 환현이 황제를 농락한 역사가 훗날 백성들이 충신이라고 여기는 유유에 의해 재현되리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유유는 중국 한(漢)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의 종족(宗族)이다. 당시에 유(劉)는 중국 한족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성씨였고, 유비(劉備)도 삼국시대의 촉(蜀)을 세우는 근거를 자신의 성씨에서 찾았다.
유씨(劉氏)의 중국 한(漢)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우월한 무력을 바탕으로 주변민족을 침략하고 탄압하였다. 하지만 중국 한족의 역사에서도 굴욕적인 사건은 여러번 발생하였다.
그 첫번째가 한고조(漢高祖;서기전 206-195) 유방(劉邦)이 서기전 200년에 흉노(匈奴)에게 평성(平城;산서성 대동 동북쪽)에서 7일간 포위당하고 끝내는 무릎을 꿇은채 흉노에게 칭신(稱臣)한 사건일 것이다.
오랫동안 굴욕적인 조공을 바치던 한나라는 그후 5대 황제인 무제(武帝) 유철(서기전 156-87)이 무력을 키워 흉노를 격파한후 겨우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뿐, 한나라는 그후 왕망이 신(新;8-23)나라를 세우는 찬탈사건을 겪었고, 적미(赤眉)의 난을 뒤이어 겨우 후한(後漢;25-220) 왕조를 세웠지만 환관과 외척의 발호로 끝내는 삼국으로 분열되는 약세기에 접어들었다.
이로부터 두 번째로 맞이한 치욕은 서진왕조(265-316)의 쇠퇴기와 더불어 시작된 5호16국 시대(304-439)와 북위(北魏;386-534)시대의 개막일 것이다. 중국 한족(漢族)은 흉노족(匈奴族), 선비족(鮮卑族), 저족(氐族), 갈족(羯族), 강족(羌族) 등 5호(五胡)에게 북중국의 영토를 빼앗기고 양자강 이남으로 ?겨가 동진(東晉;317-420)과 송(宋), 제(齊), 양(梁), 진(陳) 등 4개왕조가 거듭된 남조(南朝;420-589)의 3백여년동안(317-589) 축소지향의 생활을 유지하였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중국사는 북방 기마민족의 역사이고, 중국 한족은 대륙의 귀퉁이에 ?겨나 연명하던 변방사에 불과하였다.
만일 이때 유유(劉裕)라는 걸출한 나뭇꾼이 없었다면 아마 남조(南朝)라고 불리우는 역사(420-589)마저 유지하지 못하고 북방 기마민족에게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삼국시대를 마감하고 중원을 통일한 서진(西晉)은 영평 원년(291)부터 광희 원년(306)까지 16년동안 벌어진 8왕의 난(亂)으로 스스로 붕괴되었다. 건흥 원년(304)에 이웅(李雄;304-334)은 진(秦)과 옹(雍)에서 농민봉기를 일으키고 익주(益州)에 성한(成漢;304-347)을 세워 5호16국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흉노족인 유연(劉淵)은 304년에 평양(平陽)에서 한(漢)을 세우고 308년에는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조(趙)로 바꾸니 역사에서는 전조(前趙;304-329)라고 한다.
유연이 세운 전조는 307년부터 서진(西晉)에 반대하는 북방민족의 연합군을 형성하여 반란군대를 일으켰다. 북방연합군은 309년에 서진의 도읍인 낙양을 공격하고, 2년후인 311년에는 낙양을 점령하였다. 3대 황제인 회제(懷帝;306-313)는 사로잡혀 평양(平陽)에 감금되었다가 2년후인 313년에 살해를 당하였다.
유연의 조카인 유요(劉曜;전조 4대 황제, 318-329)는 316년에 장안에서 황제에 오른 민제(愍帝;313-316)마저도 포로로 잡고 드디어 서진을 멸망시켜 5호6국 시대의 주연으로 등장하였다.
서진(西晉)의 잔여세력은 대거 남하하여 양자강 이남에 세력을 구축하였다. 포로로 잡힌 서진의 마지막 황제인 민제는 밀령을 내려 낭야왕(琅邪王) 사마예(司馬睿)에게 대업을 의탁하였고, 사마예는 진왕(晉王낭)으로 있다가 317년에 건강(建康;남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역사에서는 이를 동진(東晋;317-420)이라고 한다.
통일왕국인 서진(西晉)이 멸망하자 북방연합군은 제각기 거점지역에서 나라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른바 5호16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한족인 장식(張寔)은 전량(前涼;314-376), 갈족(羯族)인 석륵(石勒)은 후조(後趙;319-351), 한족인 염민(冉閔)은 염위(冉魏;350-352), 모용선비족인 모용황(慕容皝)은 전연(前燕;337-370), 저족(氐族)인 부홍(符洪)은 전진(前秦;350-394)을 세웠다.
황하 북방에서 미륵부처가 지상에 하강하기 전까지 마군(魔軍)들이 들끓는 예토(穢土)를 정복하고 부처님의 나라로 만들고자 지상세계에 출현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을 표방하며 등장한 저족(氐族)의 부견황제(符堅皇帝;357-385)는 전진(前秦;350-394)의 4대 황제로 전연의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선비족이 세운 전연(前燕;337-370)을 협공하여 멸망시킨뒤 북중국의 패자가 되었으며, 나아가 남쪽의 동진(東晋)까지 흡수하여 천하의 주인이 되고자 하였다.
383년 8월부터 11월까지 벌어진 전진(前秦)과 동진(東晋)의 비수전쟁(肥水戰爭)은 북방민족과 남방 한족이 천하의 운명을 놓고 겨룬 전쟁이었다. 여기에서 전진(前秦)이 결정적으로 패배하자 복속되었던 여러 민족과 지역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켜 전진(前秦)의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376년부터 384년까지 전진(前秦)에 의해 통일된 북중국은 비수전쟁 이후로 다시 분열되기 시작하여, 강족(羌族)의 요장(姚萇)은 후진(後秦;384-417), 선비족인 모용수(慕容垂)는 후연(後燕;384-407), 같은 선비족인 모용홍(慕容泓)은 서연(西燕;384-394), 걸복선비인 걸복국인(乞伏國仁)은 서진(西秦;385-431), 대(代338-376)를 세웠다가 전진(前秦)에게 멸망당한 탁발선비족은 10년후인 386년에 북위(北魏)를 다시 세웠으며, 저족(氐族)인 여왕(呂光)은 후량(後凉;386-403)을 세워 전진(前秦)의 영토를 분할하였고 전진은 10년이 지난 394년에 후진(後秦)에게 멸망당하였다.
북방에서는 그후 여러 나라가 멸망과 건국을 반복하며 부침(浮沈)의 영화(榮華)를 장식하였다. 독발선비인 독발오호(禿髮烏弧)는 남량(南涼;397-414), 모용선비인 모용덕(慕容德)은 남연(南燕;398-410), 한족인 이고(李暠)는 서량(西凉;400-421), 흉노족인 혁련발발(赫連勃勃)은 하(夏;407-431), 한족인 풍발(馮跋)은 북연(北燕;407-436), 흉노족인 저거몽손(沮渠蒙遜)은 북량(北涼;401-439)을 세웠다. 북방의 분열은 탁발선비족이 세운 북위가 439년에 북량을 정복하여 북방을 완전히 통일할때까지 50년동안 지속되었다.
훗날 유송(劉宋;420-479)이라 불리는 남조(南朝)의 송(宋)나라를 세운 유유(劉裕;363-422 생졸)는 이러한 난국의 시대에 동진에서 태어났다.
동진(東晋;317-420)은 서진(西晉;265-316)의 귀족들이 양자강 이남으로 남하하여 세운 왕조였다. 어느때보다 귀족들의 권력이 왕권보다 강하였고, 북방의 5호(五胡)를 막기위해 군사권력을 지난 지방 호족들도 틈만나면 중앙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유유는 동진이 들어서고 50년이 조금 못되는 363년에 팽성(彭城;강소성 서주)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머니는 태어나자 마자 세상을 떠났으며 그는 군공조(郡功曹)라는 하급 관리였던 아버지를 따라 경구(京口;강소성 진강)에서 가난한 삶을 지속하였다. 그후 아버지를 여의고 신주(新州;진강)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나뭇꾼과 어부를 하면서 지냈다. 강건한 체력과 담력은 이때부터 길러졌다고 볼 수 있다.
유유는 힘이 세고 투지도 있으며 도박에도 능하였다. 동네사람들은 도박에 미친 유유를 경멸했다. 오죽하면 어렸을 때 빌붙어 사는 놈이라는 뜻의 기노(寄奴)라 불리웠겠는가.
“저놈은 틀려먹었어. 가난한 주제에 매일 도박이나 하고 술마시며 못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만 좋아하니...”
유유는 그럴때마다 이렇게 대답하였다.
“하하하! 지난날 귀가 큰 유비라는 사람은 짚신을 삼고 돗자리를 짜서 먹고 살았지만 훗날 촉(蜀)의 황제가 되었지 않소?”
한 사람의 성격이 형성되는데는 여러 가지 삶의 경험이 바탕된다. 도박은 비록 투기에 가깝고 요행을 바라는 오락이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가능성에 대한 도전적인 성격을 만들 수 있다.
삼국시대의 위(魏)나라를 세운 조조(曹操)도 10살의 나이로 당시에 유행하였던 개달리기(走狗) 시합만 있으면 돈을 걸어 용돈을 벌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의 숙부가 경전을 공부하지 않는 그를 나무라자 태연스럽게 어차피 난세에서 살아가는게 도박인데, 경전을 읽는 도박이나 개달리기를 즐기는 도박이나 다를게 뭐가 있느냐고 대답하였다고 하니, 난세의 영웅이나 효웅들은 도박을 좋아하는 성격을 타고 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박은 오히려 유유에게 버릴때는 과감하게 버리는 과단성과 모험을 즐기는 성격을 만들었다. 더욱이 역사적인 결단이 필요할 때 도박에서 형성된 선택의 방식은 많은 부분에서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
어부와 나뭇꾼 생활은 산천지리(山川地理)에 능숙한 실력을 키워주었다. 옛날의 전투는 대부분이 산을 의지해 진을 치고, 강줄기를 따라 이동하였기 때문에 주변의 산하(山河)에 익숙한 사람이 유리한게 당연하였다.
게다가 그는 직접 짚신을 삼아서 저자거리에 나가 장사를 하였다. 비록 미천한 직업이었지만 책에서 배우고 익히는 세상사가 아니라 직접 몸으로 느끼고 체험하며 사는 방식을 배웠다. 이런 면에서 그의 어렸을 때 고생은 유유의 신중한 성격과 모나지 않은 처세의 철학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어느날 사도(司徒) 왕시(王諡)라는 사람이 공무 때문에 경구(京口)에 가다가 길에서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젊은 사람이 나무에 묶여 매를 맞고 있는데 때리는 사람도 신이 나지 않고, 맞는 사람도 발악을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보시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길래 사람을 팬단 말이오?”
두드려 패던 사람이 말했다.
“나는 습규(習逵)라고 하며 이 사람은 기노(寄奴)라고 하는데, 내게 돈을 꾸고 아직까지 갚지를 않아서 매로 대신한다오?”
왕시가 생각하기에 너무나 황당한 일이었지만 경구에 사는 기노라는 젊은이의 이름을 들은적이 있어서 얼른 그를 대신하여 매빚을 갚아주고 말했다.
“그대는 호걸이라고 들었는데 어찌하여 소인배처럼 굴욕을 감수하며 살아간단 말이오?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싶은 생각이 없는거요?
유유는 왕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말했다.
“사방에 웅지를 펼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추천을 하지요. 북부군의 유뢰지(劉牢之;?-402)장군이 진강(鎭江)의 북쪽에서 병사를 모집하고 있소이다. 내가 추천서를 써서 줄테니 그곳에 투신하는게 어떻겠소?”
이렇게 해서 유유는 당시에 하층민이라 여기던 나뭇꾼, 짚신장이, 어부, 농사일을 벗어던지고 가장 버티기 힘들다는 군인의 길에 들어서는 첫발을 내디뎠다. 역시 도박을 즐기고 무용(武勇)이 뛰어난 그의 결단력이었다.
북부군(北府軍)은 독강북제군사(督江北諸軍事)의 직책을 지닌 대장군 사현(謝玄;343-388)이 북방의 전진(前秦)을 막기위해 조직한 군대이다. 왕시가 유유를 추천한 전장군(前將軍) 유뢰지는 북부군(北府軍)의 장군으로, 자(字)는 도견(道堅)이고 팽성(彭城) 출신이다. 그는 사현의 밑에서 여러차례 북벌(北伐)에 참가하여 무용(武勇)을 떨쳤으나, 지혜가 부족하여 대업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유유는 유뢰지의 군문에 들어가 호탕한 행동과 거침없는 말투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곧바로 유뢰지의 조카인 하무기(何無忌), 유뢰지의 아들인 유경선(劉敬宣) 등과 결의형제를 맺고 나이에 따라 맞형이 되었다.
이처럼 그는 군문(軍門)에서도 제대로 사람을 볼줄 알았으며 줄을 잡는데도 귀신같은 재주가 있었다. 그의 이같은 능수능란한 외교술은 훗날에 숱한 장애를 이겨내는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에 동진(東晋)은 잃어버린 북쪽의 땅을 되찾는게 국가적인 과제였고, 북방(北方)의 세력은 남방(南方)의 동진(東晋)을 격파하여 천하를 통일하는데 주력하였다.
동진(東晋)의 대부분 장군들과 조정대신들은 북벌(北伐)이란 깃발을 들고 자신들의 세력을 키운 다음에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환온(桓溫;312-373년 생졸)이었다. 그는 명제(明帝;322-325)의 부마(駙馬)로 영화 원년(345)에 형주자사(荊州刺史), 영호남만교위(領護南蠻校尉)가 되어 양자강 상류지역의 병권을 장악하고 2년뒤인 347년 3월에 서정(西征)에 나서 저족(氐族)의 이웅(李雄)이 세운 성한(成漢;304-347)을 멸망시켜 자신의 위상을 확고하게 다졌다.
영화 10년(354)에 드디어 북벌(北伐)의 기치를 내걸고 전진(前秦)을 공격하여 승리를 얻었으나 태화 4년(369)에 전연(前燕;337-370)을 치는 북벌에는 실패하였다. 하지만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태화 6년(371)에 폐제(廢帝;365-371)를 내?고 낭야왕(琅邪王) 사마육(司馬昱)을 추대하여 황제로 삼으니 간문제(簡文帝;371-372)이다.
환온(桓溫)은 간문제를 뒤이어 황제가 되고자 하였으나 간문제는 셋째아들인 사마요(司馬曜;효무제, 372-396)에게 황위를 넘겨주었고, 고숙(姑孰;안위성 당도)에서 조정의 대권을 지휘하며 때를 기다리던 환온은 결국 황제의 꿈만 꾼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환온의 꿈은 그의 아들인 환현(桓玄;369-404)에게 계승되었다. 하지만 이는 아주 뒷날에 이루어지는 얘기이고, 자질이 떨어지는 사마요가 효무제가 되자 조정의 대권은 황제의 동생인 회계왕 사마도자(司馬道子;364-402)에게 들어갔다.
당시에 황후의 오빠인 왕공(王恭‘?-398)은 경구(京口)에서 북부군을 장악하고, 은중감(殷仲堪;?-399)은 물산이 풍부한 형주(荊州)를 차지하여 사마도자에 대항했다.
사마도자는 심복인 왕국보(王國寶;?-397), 왕서(王緖)를 통해 중앙조정의 병권을 통제하고, 역양(歷陽)에 주둔하고 있는 유해(庾楷)를 외부지원군으로 삼았다.
396년 9월에 효무제가 장귀인(張貴人)에게 독살당하고, 백치아들인 사마덕종(司馬德宗)이 안제(安帝;396-418)가 되었다. 안제의 숙부인 사마도자는 섭정(攝政)의 지위에 올라 적대세력인 왕공과 은중감의 병권을 탈취하려고 준비하였다.
397년에 환현은 중서령(中書令) 왕국보(王國寶)가 사마도자의 지시를 받아 조정대권을 장악하고 지역의 군벌들을 약화시키려는 계획을 꾀하자, 은중감(殷仲堪), 양전기(楊佺期;?-399)를 선동하여 왕공(王恭)을 맹주로 추대하고 왕국보를 제거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뒤이어 왕공이 사마도자의 세력인 강주자사 왕유(王愉)를 공격할때도 환현은 참여하여 강주지역을 차지하고 세력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왕공은 지나치게 교만하여 군대세력과 북부병을 무시하고 천대하였다. 그러자 북부군 장군 유뢰지가 사마도자의 아들인 사마휴지와 연합하여 왕공을 공격하여 살해하였다.
사마도자는 이어 은중감을 고립시키고자 환현(桓玄)을 회유하여 강주자사(江州刺史)로, 양전기는 옹주자사(雍州刺史)로, 환수(桓修)는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은중감이 여전히 환현, 양전기와 연맹을 맺고 오히려 환현을 맹주로 추대하자 하는수 없이 형주지역을 그대로 은중감에게 맡겼다.
이렇게 해서 동진의 땅은 중앙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사마도자와 그의 아들들인 양주자사 사마원현(司馬元顯;?-402)과 서쪽의 예주(豫州)를 장악한 사마상지, 경구(京口)와 강북(江北)을 장악한 북부병의 유뢰지와 고아지(高雅之), 석두성 남쪽지역을 나누어 차지한 환씨(환현, 환수), 은씨(은중감), 양씨(양전기) 3대 문벌이 각각 천하를 3분(分)하여 장악하였다.
환현은 강주에서 세력을 키운 후 399년에 양전기와 은중감을 공격하여 양자강 중류를 장악하고 석두성 남쪽을 모두 차지하였다. 이에 양주자사인 사마원현은 환현의 세력이 커지기 전에 제거하고자 유뢰지를 전봉도독(前鋒都督)으로 삼아 선봉을 맡기고 환현을 공격하였다.
유뢰지의 외숙인 하목지(何穆之)는 환현이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계책으로 유뢰지와 환현의 틈을 벌리고 나아가 쌍방의 힘을 약화시키는 전략으로 판단하고 유뢰지를 설득하였다.
“조카님 보시게나! 이는 차도살인의 계책이니 환현과 대항하지 말고 조용히 전세를 관망하기 바라네. 옛말에도 새를 잡으면 활을 숨기고, 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를 구워 먹는다고 하지 않았나?”
유뢰지는 외숙의 의견에 따라 아들인 유경선을 밀사로 환현에게 보내 길을 열어줄테니 건강(建康)을 공격하도록 요청하였다.
환현은 유뢰지의 도움으로 건강성을 함락하여 사마원현을 죽이고 동진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도운 유뢰지는 회계내사(會稽內史)로 임명하여 병권없는 지방행정 관리로 좌천시켰다. 유뢰지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북부병의 장군들과 모의하여 환현을 공격하려고 준비했으나 많은 심복들과 장군들은 여러차례 배신을 일삼은 유뢰지를 믿지 못하고 뿔뿔히 흩어져 제 살길을 찾았다. 이로써 유뢰지는 반란에 실패하고 울분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환현(桓玄)은 유뢰지(劉牢之)를 제거하고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기 위해 가장 강력한 반대세력인 북부군(北府軍)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이때에 북부병 장군 유뢰지의 핵심장교였던 유유는 자신의 장기(長技)인 외교술을 발휘해 앞장서서 북부병의 총수로 환현을 추대하고, 그곳의 참군(參軍)으로 발탁되었다. 적대적인 상대의 앞에서 웃음을 짓지만 뒤에서는 칼날을 준비하는 이른바 웃음속에 칼을 숨기다는 소리장도(笑裏藏刀)의 생존방식이었다. 유유는 졸지에 유뢰지의 참모에서 환현의 참모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고, 권력의 중심부로 직행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하였다.
유유의 참모인 군사(軍師) 단도제(檀道濟;?-436)는 그에게 [36계}라는 병법을 설명하면서 무중생유(無中生有)의 장기적인 생존전술을 제시하였다. 단도제는 단공(檀公)이라 부르는 사람으로 [삼십육계(三十六計)]라는 병법서를 지었고 뛰어난 계책과 화술로 이름을 날리던 유유의 핵심참모였다.
“주군! 환현은 이미 욱일승천하는 기세입니다. 이때 부딪히면 당하는 쪽은 힘이 약한 우리 쪽입니다. 적을 안심시키고 기회를 엿보는 무중생유(無中生有)의 전술이 최적입니다.”
“무중생유란 어떤 전술을 말하는 것이오? 단공(檀公)!”
“거짓을 사실처럼 꾸미거나, 사실을 거짓처럼 꾸며서 적의 이목을 흐힌 다음에 실력을 키우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공격하여 승리를 취하는 병법의 하나이지요. 일찍이 진(晉)의 천하를 열었던 사마의(司馬懿)도 조조(曹操)에게 충성을 모두 바치는듯 하였지만, 막상 조조가 죽고나니 곧바로 군사를 일으켜 권력을 차지하였는데 이게 바로 무중생유의 전법입니다.”
얼마후 손은(孫恩;?-402)이 일으킨 농민봉기를 진압하여 조정에서 권력과 병권이 강해진 유유에게 환겸(桓謙)이 찾아와 말했다.
“초왕(楚王;환현)은 국가를 위한 공덕이 하늘같아서 많은 조정 대신들이 마땅히 선양을 받아야 한다고들 날리인데, 공(公)의 생각은 어떴소?”
유유는 이미 단도제(檀道濟)의 제안에 따라 대답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이때에도 거침없이 환현에게 아부를 하면서 그를 충동질 하였다.
“초왕의 권세와 능력은 이미 동진의 천하를 누르고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새로운 세상을 열면 많은 백성들이 만세를 부르며 기뻐 날뛸 것입니다.”
유유는 이처럼 상대의 마음을 꿰뚫고 선동하는데도 능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그는 외교가의 자질을 평가하는데 주요한 기준의 하나인 10푼의 의도(意圖) 가운데 항상 마음속에 3푼(分)을 숨기라는 진리처럼 은밀하고 치밀하게 반환세력(反桓;환씨세력에 반대)을 결집하기 시작했다.
유유는 비록 환현이 오늘 불같이 일어나는 기세지만 백성들의 신망을 잃고 반대파도 많기 때문에 환씨들의 권세가 몰래가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때 유유의 진영에 참가한 사람들은 실제로 군사를 동원했을 때, 작은 인원을 신속하고 확실하게 통솔할 수 있는 북부군의 중급, 하급 장교들이었다. 주요한 사람들은 결의형제인 하무기(何無忌)와 북부군의 장교인 위영지(魏咏之), 단빙(檀凭)등 이었다.
환현은 드디어 402년 12월에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초(楚)라 하고 연호를 영시(永始)라고 하였고, 황제였던 안제(安帝;396-418)는 평고왕(平固王)으로 강등시켜 심양(尋陽)으로 보냈다.
환현의 아내는 어느날 조회석상에서 위풍이 당당하고 의젓하게 황제를 배알하는 유유를 보고 저녁에 남편에게 말했다.
“참군(參軍) 유유는 비범한 사람이에요. 당신에게 언젠가는 화(禍)가 될터이니 크기전에 일찌감치 싹을 제거하세요.”
그말에 환현은 오랫동안 고심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북벌(北伐)을 단행하여 천하의 주인이 되고 싶은데, 유유같은 인재는 찾기가 쉽지 않은 사람이오. 중원을 되찾은 후에 단행해도 늦지 않는다고 보오!”
이미 동진(東晋)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고 굳게 믿었던 환현은 충분하고도 여유있게 유유 정도는 제거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404년 2월 28일, 유유가 하무기, 위영지 등과 함께 수백명의 병력을 이끌고 경구(京口)에서 환현을 반대하는 군사반란을 일으키자, 같은 북부군의 유의(劉毅;?-412), 맹창(孟昶), 유도규(劉道規) 등은 군사반란의 소식을 듣고 이에 호응하여 경구(京口)에서 유유의 군대와 합세하여 건강(建康)으로 군사를 움직였다.
북부군의 장수들은 유유와 유의의 반란에 동조하여 병력이 수만으로 늘어났고, 연패(連敗)를 거듭하던 환현은 ?겨나 있던 진안제(晉安帝)를 인질로 삼아 구강(九江)으로 달아났다.
뒤를 ?던 유의는 강릉에서 환현을 잡아 살해하고, 진안제는 구강에서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의희 원년(405)에 유유가 파견한 하무기가 구강에서 진안제를 건강으로 모셔왔다.
진안제는 유유에게 시중(侍中), 거기장군(車騎將軍),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를 제수하였으나, 유유는 받지 않고 경구로 돌아갔다. 그것은 군사실권이 없는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진안제는 하는 수 없이 유유에게 군사적인 실권과 행정권력이 있는 도독(都督) 형(荊)‧사(司)등 16주(州) 제군사(諸軍事) 겸 연주자사(兗州刺史)를 내리고 경구(京口)에 주둔하게 하였다.
405년 6월에 유유는 북방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후진(後秦;384-417)에 사신을 보내 지난날 전진(前秦)에게 잃어버린 동진(東晋)을 영토를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후진은 북방의 통일왕국인 전진(前秦)을 멸하고 들어선 나라로, 장안(長安)에 자리잡고 안정된 통치기반을 바탕으로 403년에는 후량(後凉;386-403)을 멸하여 그 땅을 차지하고, 북량(北涼;401-439)을 신하국으로 거느렸다.
당시 후진의 문환제(文桓帝;394-416) 요흥(姚興)은 신하들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유유는 출신이 미천하지만 수백의 군사로 환현을 물리치고 진(晉)의 황실을 부흥시킨 사람이오. 그래서 과인은 섣불리 적대하기 보다는 화친에 응하는게 좋다고 생각하오.”
후진의 중앙조정은 당시에 북쪽의 북위(北魏)와 하(夏;407-431), 서쪽의 서진(西秦;385-431), 동쪽의 남연(南燕), 남쪽의 동진(東晋)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동진(東晋)과 적대하기 보다는 영토를 할양하는게 낫다고 판단하였다.
유유는 국제정세를 이용한 외교적인 전략으로 남향, 순양, 신야, 무양등 12군(郡)을 무혈로 획득하여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유유의 권력이 커질수록 반대파의 시기와 견제도 커져갔다. 유유와 함께 반란을 주도하였던 유의(劉毅)는 유유가 수도인 건강(建康)에 입성하여 중앙조정의 실세로 크는 것을 결사 반대하였다. 그는 상서우승(尙書右丞) 피침(皮沈)을 경구(京口)에 보내 유유의 의중을 떠보았다.
유유는 참모인 유목지(劉穆之)를 대신 보내 피침을 응대하도록 하였다. 피침은 유유에게 두가지의 조건을 제시하였다.
“중앙조정에서는 두가지 안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혼(謝混)을 양주자사(揚州刺史)로 보내는 방법과 다른 하나는 유 장군께서 연주자사와 양주자사(揚州刺史)를 겸하되 중앙의 관직은 맡지 않는 방법입니다.”
유목지는 두가지 안의 궁극적인 목표가 유유를 중앙에 오지 못하게 하려는 방안임을 눈치채고 급히 유유에게 돌아왔다.
“지금 중앙조정은 통제불능의 상태입니다. 주군께서는 진의 황실을 다시 일으킨 1등공신인데 지금은 지방의 행정관에 머물러 있습니다. 유의와 맹창(孟昶)이 누구입니까? 주군이 깃발을 들고나서야 비로소 뒤를 따르던 사람들인데, 지금은 형식상으로 주군을 수령으로 모실뿐 모두 딴 생각을 품고 있는 자들입니다. 지금 그들의 실력은 주군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 않기 때문에 기회가 온다면 주군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들의 공격을 막기위해 내가 어떤 준비를 해야하오?”
유목지는 그제서야 자신의 속내를 들어냈다.
“아시다시피 양주(揚州)는 인구와 물산이 풍부하고, 수도인 건강(建康)을 통제하는 지방입니다. 결코 남에게 주어서는 절대 안되는 땅입니다. 양주가 남의 손에 넘어가면 누구든지 훗날 그 사람의 결정에 따라야 합니다. 권력은 한번 놓치면 다시 되찾기가 쉽지 않은 법입니다.”
유목지는 유유에게 크게 2가지의 안을 제시하였다.
“주군께서는 조정에 2가지의 방안을 내십시오. 나라의 중심지역은 근거지로 삼기에는 좋지만, 국가적인 대사가 발생하면 지방은 정보에 약해 대책을 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방에 근거지를 확보하고, 나아가 중앙에도 끈을 만들어 놓아야 됩니다. 주군께서는 속히 중앙으로 가시어 승상(丞相)의 직책을 요구하십시오, 결코 승상(丞相)과 양주자사라는 두 개의 관직은 잃어서는 안됩니다.”
유목지의 건의대로 유유는 조정에 힘을 발휘하여 시중(侍中),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양주자사(揚州刺史), 록상서사(錄尙書事)와 아울러 서주(徐州), 연주자사를 겸하였다.
유유는 중앙조정의 실세관직을 장악하고 이와 더불어 양주, 서주, 연주를 발판으로 가장 세력이 강한 군벌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때쯤에 이르러 유유의 참모인 유목지, 단도제 등이 장기적인 계책을 올렸다.
“서진을 개국한 사마의는 대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비록 대권은 장악하였지만 지역에 있는 장군들을 의식해서입니다. 만일 황제를 내?았다간 그 순간에 야심을 가진 장군들에게 반란의 명분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황제의 옆에 있는 간신들을 제거한다는 청군측(淸君側)의 논리이지요.”
단도제의 말에 이어 유목지가 입을 열었다.
“환현의 실패를 교훈삼으소서. 각지의 장군들은 각개의 병력은 많지 않지만 뭉치면 중앙정부군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세력을 제거한 뒤 대업을 이루어도 늦지 않습니다. 사마의는 대업을 이루고 황제가 될 수 있었지만 자신이 황제가 되지 않고 아들인 사마소(司馬昭)에게 맡겼고, 그의 아들 사마소도 자신의 아들인 사마염에게 기회를 넘겼습니다. 결국에는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이 황제가 되어 오늘의 진(晉)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를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어떤 단계를 밟는게 좋겠소?”
“우선은 각지에 가지를 치고 있는 황족들의 힘을 제거하고, 그 다음은 북벌을 성공시켜 백성의 지지를 얻어내고, 마지막으로 지역의 장군들을 포섭하거나 세력을 제거하여 반대세력이 완전히 없어졌을 때 대업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죽이거나 내?는 방식보다는 선양(禪讓)을 받는게 가장 으뜸입니다.”
유유는 참모들의 말대로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첫단계의 작업에 들어가 중앙조정에 있는 황족들의 세력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유유의 절대권력과 견제에 위협을 느낀 많은 황족들이 이웃나라로 달아나거나 지역 군벌들에게 의탁하였다. 황족인 사마국번(司馬國璠), 사마숙번(司馬叔璠), 사마숙도(司馬叔道) 3형제도 후진(後秦)으로 망명하였다. 후진의 황제인 요흥이 세사람에게 물었다.
“유유는 환현을 물리치고 진의 황실을 일으킨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 나라로 망명하는 것이오?”
세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유유는 지략이 뛰어나고 음모에 밝아 아주 천천히 은밀하게 황실을 약화시켰습니다. 만일 황족 중에 재능이 비범하면 그는 어떤 이유를 들어서든지 제거했습니다. 유유는 이미 동진의 화근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어디 환현같은 사람이 비기겠습니까?”
유유는 황제가 되는 첫걸음의 발판을 훌륭하게 만들어 나갔다. 이어서 그는 두 번째 단계로 북벌을 단행하였다.
당시에 모든 군벌들이 황제가 되려는 야욕은 북벌(北伐)이라는 깃발을 이용하였다. 유유도 예외는 아니었다. 의희 5년(409)에 북방의 남연(南燕)은 동진(東晋)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이용하여 세력을 계속 남쪽으로 확장시켰다.
북벌의 명분을 찾던 유유는 드디어 통일전쟁에 나섰다. 이번 북벌의 최대목적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아 백성의 지지를 얻어내는 일과 함께 자신의 지지세력인 북부병의 장군들을 확실하게 통제하려는 의도였다.
409년 4월에 유유는 북정군(北征軍)을 이끌고 북진에 나서 곧바로 낭야를 되찾고 뒤이어 대현(大峴;산동성 기수)에서 남연군을 격파하고 동완(東莞;산동성 기수현)을 탈취하였다. 남연황제 모용초(慕容超;385-410)는 대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섰으나 유유에게 대패하여 광고(廣固;산동성 익도)에서 수개월을 응전하였다. 하지만 남연의 응원세력인 후진(後秦)이 북쪽의 하(夏)와 격전을 치루고 있어 응원군은 오지 않았다.
유유는 기세를 몰아 광고성을 함락하고, 남연황제 모용초는 건강으로 호송되어 그곳에서 참수되었으며, 남연의 땅인 청주, 연주는 동진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이듬해인 410년에는 손은(孫恩)의 잔여세력인 노순(盧循)과 서도복(徐道覆)이 농민봉기군을 이끌고 건강(建康)을 공격하였다가 유유에게 진압되었다. 북벌의 성공과 농민봉기군의 진압으로 많은 백성들의 신망을 얻은 유유는 드디어 대업의 2번째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 해에 유유는 최고군사장관인 태위(太尉)와 최고지방 행정장관인 중서감(中書監)을 차지하였다. 이제 중앙조정에서 유유를 견제하거나 공격할 수 있는 세력은 전무(全無)하였고, 있다면 오로지 형주에 기반을 두고 있는 유의 정도였다.
이때쯤이면 이제 저자거리의 백성들도 유유의 야심을 모르는 이 없었다. 드디어 유유와 함께 환현을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킨 유의(劉毅)가 칼을 빼들었다. 그는 유유가 황제가 되려는 길목에서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유의는 이때 형주자사(荊州刺史) 겸 위장군(衛將軍), 도독(都督) 형(荊)‧녕(寧)‧태(泰)‧옹(雍) 4주(州) 군사(軍事)를 맡고 있었지만 아직 건강(建康)에 머물며 임지로 떠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의 세력은 결코 유유에게 떨어지지 않는 군사력이었지만, 역으로 그는 중앙조정에서 밀려나 있고 임지로 떠나지 못한 상태라 심기가 불편하였다.
유의는 유유를 떠보기 위하여 자신에게 광주자사, 교주자사를 제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어서 자신의 측근인 치승시(郗僧施)에게 남만교위(南蠻校尉), 후장군부사마(後將軍府司馬)로, 모수지(毛脩之)에게는 남군태수(南郡太守)를 요청하였다.
유유는 두말없이 유의에 요청에 응답하였다. 얼마후 유의는 다시 유유에게 서신을 보내 경구(京口)에 있는 조상묘를 참배하고 임지인 형주로 가겠다고 전하였다.
녕원장군 호번(胡藩)이 유유에게 반대를 표시하였다.
“대인께서는 이번에도 유의의 의견을 들어줄 생각이십니까?”
유유는 한동안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생각으로는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유의가 현재 대인에게 복종하고 있는 까닭은 대인께서 백만대군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유의는 학문이 깊고 여러 문인지사(文人志士)와 교류를 맺고 있어 시간이 지나면 대인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러하니 이번 기회에 임지로 보내지 말고 제거하십시오.”
“나는 그와 함께 진 황실을 부흥시킨 공신이오. 그의 잘못도 뚜렷하지 않은데 어떻게 제거할 수 있단 말이오?”
유유는 결국 유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412년 9월에 유의는 건강(建康)을 떠나 형주의 치소인 강릉(江陵)에 이르러 많은 군수, 현령을 바꾸고 자신의 측근으로 대신하였다. 아울러 예주(豫州), 강주(江州)에서 1만에 달하는 장수와 병사를 차출하여 형주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유의는 곧 병이 들어 생명이 위태했다. 치승시(郗僧施) 등 핵심참모들은 뒷일을 위해 유의(劉毅)의 당제(堂弟)인 유번(劉藩)을 유의의 후계자리인 부직(副職)에 제수해달라고 유유에게 요청하였다.
유유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표면상으로는 허락을 하였지만, 유번을 제거할 준비를 하였다. 광릉(廣陵)에 있던 유번은 황제의 조서를 받기 위해 건강성으로 급히 달려왔다.
유유는 곧바로 유번을 체포하고, 상서복야(尙書僕射) 사혼(謝混)과 유번이 공동으로 모반을 획책했다는 죄명으로 두 명을 은밀하게 처형했다. 중앙조정은 물론이고 형주지역은 이러한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이튿날 유유는 유의 세력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 황제의 조서(詔書)를 빌려 황족인 사마휴지(司馬休之)를 형주자사로 삼아 유의를 대신토록 하였다. 이어 자신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건강을 출발하여 형주로 진격하였다.
선봉을 맡은 왕진오(王鎭惡)는 신임 형주자사를 호송한다는 명분으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 강릉성(江陵城) 외곽의 수군전함을 모두 불태우고 곧바로 강릉성에 이르렀다. 그런데 마침 강릉성의 정문이 열려있고, 대부분의 수비병들은 왕진오의 병사들과 동향(同鄕)이었다. 왕진오는 이들과 합세하여 때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형주부로 쳐들어가 일거에 강릉성을 점령하였다. 졸지에 습격당한 유의는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장탄식을 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유는 강릉성에 입성하자 유의의 참모인 치승시는 처형하고 모수지(毛脩之)는 용서하여 자신의 수하로 거두었으며, 유의의 참군(參軍)이었던 신영(申永)의 건의에 따라 형주지역의 부세를 경감하고 부역과 공납의 물량을 삭감하여 형주 백성의 절대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유유가 유의를 제거하고 형주를 장악하였다는 소식은 같은 공신의 반열에 있는 예주자사 제갈장민(諸葛長民)을 극도로 긴장시켰다. 제갈장민의 아우인 제갈여민(諸葛黎民)이 계책을 내놓았다.
“유의가 제거되면 다음은 누구겠습니까? 우리 제갈 가문이 표적입니다. 아직 유유가 형주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이때에 거사를 하지요?”
제갈장민은 아우의 계책에 따라 밀서를 기주자사(冀州刺史) 유경선(劉敬宣)에게 보냈다. 그러나 유경선은 의형인 유유에게 이 사실을 고하였다.
“하하하! 내 아우가 나를 배신할리는 없지!”
유유는 참모들의 건의에 따라 왕탄(王誕)을 우선 건강성으로 보내 제갈장민의 동태를 살피고, 자신은 강릉성을 떠나는 날짜를 통보하였다. 제갈장민과 조정대신들은 매번 편지를 받고 신정(新亭)에 나와 유유를 응접했지만 유유는 오지 않았다. 이렇게 몇차례 약속을 어긴 유유는 2월 30일에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은채 강릉을 떠나 건강성으로 몰래 들어와 태위부에서 제갈장민과 제갈여민 등을 모두 체포해 처형하였다.
이른바 적에게 틈을 주지 않고 기습하여 제거하는 전략이었다. 제갈장민은 유유의 계책에 속아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채 참패하였다. 이렇게 해서 동진(東晋)의 가장 강력한 무장집단인 북부병은 모두 유유가 장악하였다.
이제 유유에게 남은 마지막 적대세력은 황족인 형주자사 사마휴지였다. 415년 3월에 사마휴지가 옹주자사 노종지(魯宗之)와 함께 유유를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유유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핵심측근인 참군(參軍) 단도제(檀道濟), 주초석(朱超石)에게 보기병을 이끌고 양양(襄陽)으로 진격토록 하고, 사위인 진위장군 서규지(徐逵之)를 선봉으로 삼아 강하구(江夏口)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참패하여 서규지는 전사하였다. 분노한 유유는 마두(馬頭)에 진을 치고 호번(胡藩)을 선봉대장으로 삼아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5월 12일에 참패를 당한 형주자사 사마휴지, 그의 아들인 사마문사(司馬文思)와 노궤(魯軌)는 후진(後秦)으로 달아나 망명하였다.
유유는 사마휴지를 제거하고 조정에서 가장 높은 지위와 귄위를 지니게 되었다. 그는 조회를 하거나 궁궐에 들어올 때 검을 찰 수 있었고, 입조(入朝) 할 때 허리를 굽히거나 잰걸음을 하지 않은채 팔자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을 수 있었고, 주청을 올릴 때 관직과 이름을 말하지 않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유유는 황제가 되고자 하는 3번째 기반을 튼튼하게 구축하였다.
417년 봄이 되었다. 유유의 측근들은 이제 황제에 오르는 마지막 위엄(威嚴)과 업적을 준비하였다. 북방의 후진으로 달아난 황족(皇族)들을 제거하기 위한 북벌의 단행이었다. 유유는 11월에 이르러 후진의 장안을 점령하고 드디어 후진을 멸하였다. 그는 12월에 건강성으로 다시 돌아와 상국(相國), 송공(宋公)의 지위에 올랐다.
이듬해인 418년부터 건강성에는 이상한 동요가 유행하였다.
“창명(昌明)의 뒤에 두 명의 황제가 있다”
창명은 안제(安帝) 사마덕종의 자(字)였다.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하였다.
“우리 황제를 뒤이어 2명의 황제가 나온뒤에 망한다는 뜻이래.”
“그게 아니야. 한명이 뒤를 잇고 다른 한명은 다른 나라를 세운다는 뜻이래!”
유유의 참모들은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418년 12월 17일에 유유의 측근인 중서시랑(中書侍郞) 왕소지(王韶之)가 동당(東堂)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안제를 목졸라 죽였다.
유유는 안제의 조서를 빌어 그의 동생인 낭양왕 사마덕문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가 동진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恭帝;419-420)이다.
동진(東晋)의 남은 황족들은 다투어 북방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북위(北魏)로 달아나고, 이제 동진(東晋)의 황실에서는 자신들의 기반을 지켜낼 혈족(血族)이 거의 없어졌다. 419년 7월에 유유는 송왕(宋王) 되어 수춘(壽春)에 주둔하였다.
420년 정월 첫 번째 조회날에 유유는 조정의 대신들에게 자신의 거취를 말하였다.
“나는 환현이 찬탈을 꾀하였을 때 의로운 깃발을 들어 진의 황실을 되살려 놓았소. 그후 서정(西征)과 북벌(北伐)을 성공시켜 그 공이 왕(王)의 지위에 이르렀소. 이제 나는 늙고 힘이 없어 모든 관직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칠까하오.”
문무백관들은 유유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충성을 칭송하고 그의 겸손을 찬양하였다. 중서령(中書令) 부량(傅亮)이 그 뜻을 눈치채고 건강으로 돌아와 황제에게 유유를 중앙조정으로 불러들이기를 청하였다.
420년 6월 11일, 유유가 중앙조정으로 출사(出仕)하자 진공제는 황위를 유유에게 넘긴다는 조서를 발표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진(晉)은 일찍이 망하였는데, 송왕(宋王;유유) ?문에 15년을 연장한 것 뿐이야. 황위를 준들 무엇이 아까우랴.”
유유는 선양의식을 거쳐 황제가 된후 나라 이름을 송(宋)이라 하였다. 동진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는 영능왕(零陵王)으로 강등되어 각종 특권을 누리며 살았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반대세력을 무마하기 위한 정지작업의 일환이었고, 1년후인 421년 9월 20일에 유유는 낭중령 장위(張偉)에게 사약을 내려보내 진공제를 살해하였다.
이처럼 권력의 승부에서 용서라는 미덕은 언제나 패배자가 기대하는 승자의 아량일 뿐이었다. 일단 패배한 사람에게는 선택의 의지가 있어도 준비를 하지 못한다면 언제나 패배자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송(宋)나라의 역사를 이룩한 유유는 치열한 권력경쟁의 승부세계에서 승리하였다. 많은 군벌과 조정대신들도 유유와 마찬가지로 황제의 자리를 노렸지만 그들은 실패하였다. 이들은 왜 실패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정세판단의 오류와 자신들의 세력에 대한 과신이었다.
권력이란 물과 같아서 밀려오고 빠져나가는 흐름을 장악해야 성공한다. 하지만 밀려온 물의 양만 보았지 오만과 독선에 빠져 빠져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지 못하면 그만큼 위험도 증가된다.
이런 점에서 유유는 한단계씩 기반을 다지면서 자신의 대업을 이룩해 나갔다. 유유는 외교(外交)의 달인(達人)이었다. 보통 우리가 외교라면 국가와 국가 사이에 벌어지는 교류를 생각하지만, 권력경쟁에서 말하는 외교는 사람, 집단, 국가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전략(戰略), 전술(戰術), 암투(暗鬪), 유세(遊說), 교우(交友), 인맥(人脈)을 포함한다.
이런 면에서 유유는 뛰어난 재주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친구를 사귀는데 능숙하였다. 북부군 장군 유뢰지의 조카인 하무기, 아들인 유경선과 교분을 맺고 빠른 시일에 북부군의 장교가 되었다.
또한 그는 군공(軍功)과 재물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부하들에게 미루었다. 그래서인지 유목지(劉穆之), 단도제(檀道濟), 왕진오(王鎭惡) 등 충성스런 참모들이 많았다.
집단의 통솔도 주요한 외교능력이다. 북부군(北府軍)은 숱한 전투에서 승리한 동진의 주력군이었고, 특히 북방을 통일한 전진(前秦)의 군대를 비수(肥水)에서 격파하여 어느 군대보다 자긍심과 용맹이 뛰어난 집단이었다. 그런데 환현은 이들이 두려워해 제거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유유는 이들 집단을 자신의 앞길에 유용한 무력(武力)으로 끌어들였다.
국가의 외교에서도 유유는 국제정세와 백성의 신망을 이용하였다. 북방의 강국으로 성장한 후진(後秦)은 전진(前秦)의 땅에서 일어나 북방통일의 야심을 가진 국가였는데, 유유가 동진의 권력을 장악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영토를 할양하며 친선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던 5호16국 시기에 그는 국제정세와 힘의 균형을 이용하는 혜안을 가졌다.
이렇게 해서 유유는 한고조 유방 이래 두 번째로 맨손에서 천하를 거머쥔 황제가 되었다. 중국의 역사에서 건달과 같이 출신성분이 아주 미미한 사람으로 천하의 주인이 된 사람은 한고조 유방이 처음이다. 그후에 새 왕조를 개창한 황제의 경우에는 자신이 황족(皇族)이거나 권문세가의 후예였고, 조부나 부친이 중앙정부의 요직에 있었기 때문에 그 후손의 권력 획득이 훨씬 용이하였다.
후한(後漢)의 역사를 개창한 광무제는 자신이 황족이었고, 삼국시대를 개창한 오(吳)나라의 손권, 촉(蜀)나라의 유비, 위나라의 조조는 모두 권문세가의 후손이거나 황족이었다. 또한 서진(西晉)을 개창한 사마염은 할아버지가 조조의 최고 참모였던 사마의(司馬懿)였고, 동진(東晋)을 개창한 진원제는 사마씨로 황족이었다.
유유는 역사에서 한(漢)나라의 종실 후예로 한고조 유방의 동생인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의 21세손이라고 하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후대의 사가들이 북방의 기마민족에게 대항하여 남조(南朝)의 역사를 지켜낸 유유(劉裕)에 대한 한족(漢族)의 자존심을 표현한 허구에 불과한 가계(家系)이다.
송무제 유유(劉裕;420-422)는 나뭇꾼, 농삿꾼, 고기잡이, 짚신장이 출신으로 출신성분은 낮았지만 5호16국시대라는 혼란기에 끝내는 봉건왕조 최고의 대권인 황제(皇帝)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평민출신으로는 패현(沛縣)의 건달이었던 한고조 유방에 이어 2번째로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유유(劉裕)가 없었다면 송, 제, 양, 진으로 이어지는 남조의 역사는 존재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는 중국 한족의 자존심을 살려준 한줄기 빛이었다. 비록 그 빛은 짧고 바람앞에 등불처럼 미미하였지만 중국 한족에게는 6조문화(오, 동진, 송, 제, 양, 진)라고 하는 선물을 안겼다. 그 선물에는 북방기마민족의 역사에 대응하는 그들만의 잔치로서 의미도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한족의 자존심이었다.
훗날에 많은 영웅들은 한고조 유방과 송무제 유유가 포의(布衣)를 걸치고 황제가 된 역사의 고사를 되새기며 어느 누구라도 능력만 있으면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이런 점에서 유유의 선택과 결단력은 의미있는 역사의 한 장으로 기억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