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뿌리로부터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이상국, 제삿날 저녁
장작을 집어넣을 때마다
불꽃들이 몸서리치며 튀어오른다
서로의 몸뚱이에 불을 붙이면서도
저렇게 태평스러운 불길들
가마솥의 물이 끓는다
뜨겁다고 끌어안고 아우성이다
저것들도 언젠가 얼음이 되리라
지난날 어머니와 내가
나란히 앉았던 아궁이 앞에
오늘은 아들과 함께
하염없이 불꽃을 바라본다
우리는 저 불꽃 속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혹은 물에서 왔을까
장작불 앞에서
술 취한 사람처럼 벌건 얼굴로
끓는 물소리를 듣고 있는데
뜬김 자욱하게 서린 부엌 안에
우리 말고 또 누가 있는 것 같다
박후기, 뜨거운 안녕
티브이 속
금강산 휴게소
이산가족 상봉장에
백발의 부부가
얼굴 서로 맞댄 채
떨어질 줄 모르고
울고있다
아직 속불꽃 벌겋게 남아
몸뚱어리 서로 들러붙은 채
이글거리는
허연 연탄재가 생각난 건
바로 그때였다
연탄집게를 들고
억지로 둘 사이를 갈라놓으면
울며 떠나는 하룻밤 사랑
뜨겁게
뜨겁게
안녕이라고
하종오, 혀의 가족사
어린 그가 눈에 티끌이 들어가 쓰라려했을 적에
어머니는 혀끝으로 핥아 빼주었다
그날부터 눈알이 밝아져
그는 어머니가 하려던 일을
먼저 볼 수 있었다
어린 그가 벌레에게 물려 몸을 긁적였을 적에
어머니는 혀끝으로 침을 발라주었다
그날부터 한동안 온몸이 가벼워져
그는 어머니가 하려던 일을
대신할 수 있었다
어린 그가 어른이 되어 낳았던
어린 자식들이 어른이 되던 날까지
어머니한테 배운 대로
그는 혀끝으로
티끌 들어간 눈을 핥아 빼주었고
벌레 물린 몸에 침을 발라주었다
그러나 티끌과 벌레 더욱 들끓는
빈부의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자식들은
그가 하려는 일을
먼저 보지도 않고
대신하지도 않고
혀를 빼물거나
혀를 끌끌 찼다
박서영, 은신처
숨을 곳을 찾았다
검은 펄 속에 구멍을 내고 숨은 지렁이처럼
침묵은 아름다워지려고 입술을 다물었을까
분홍 지렁이의 울음을 들은 자들은
키스의 입구를 본 사람들이다
그곳으로 깊이 말려 들어간 사랑은
흰 나무들이 서 있는 숲에서 통증을 앓는다
입술 안에 사랑이 산다
하루에도 열두 번
몸을 뒤집는 붉은 짐승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