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철, 지켜보는 너
인도 바라나시의 화장터에서
타오르는 죽음을 지켜본 뒤
나는
전철 안에서
승용차 안에서
왁자지껄한 대폿집에서
등산을 하면서
혼자 걸어가면서
시간 날 때마다
평온하게 타오르는 내 죽음을
가만, 지켜보는 것이다
죽음 그 후까지도
흐트러짐 없이
가만, 지켜보는 것이다
마경덕, 옥상
도시의 옥상은 매력적이다
평수에 없는 땅을 배로 늘려 덤으로 준다
14평에 살아도 사실은 28평인 셈
하늘에 등기를 마친 건물의 꼭대기는
별도로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다
많은 옥상을 거느린 하늘은
비와 햇빛과 바람으로 옥상이 자신의 소유임을 증명한다
집들의 정수리에서 상추와 고추가 자라는 것은
지붕을 싫어하는 옥상의 버릇 때문
오래된 이 습관 탓에
스티로폼 상자에 붉은 고추가 달리고 항아리에서 간장이 익는다
가끔은 쓰레기더미나 폐품을 방치하고 물탱크에
시신을 감추기도 했지만 그것은 옥상의 잘못이 아니었다
다닥다닥 달린 창문을 빠져나와
넥타이를 풀고 잠시 숨을 돌리는 곳, 도시의 숨구멍은
결국 이 옥상이다
사내들은 이곳에 와서 생사를 결정하고
하루를 충전한다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 한잔을 들고
머리 위를 날아가는 새들이나 흘러가는 구름 따위를
생각의 갈피에 눌러두어도 좋을 것이다
드물게 추락사도 있었지만
그들은 깔끔한 옥상의 성격을 몰랐기 때문
제 평수만 고집하는 옥상은 한 뼘의 허공도 탐내지 않는다
한 발이라도 제 품을 벗어나면 결코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평수에도 없는 땅에 옥탑방을 들이고
꼬박꼬박 월세를 챙기는 주인도 가져갈 수 없는 건
아무도 그 평수를 모르는 탁 트인 하늘이다
최정아, 손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방전된 듯 캄캄해졌다
삶이란
하루를 풀어가는
서술형 문장들이다
손등의 잔주름은
내가 나를 필사해놓은
과거형 답안들이다
땅에 넘어지려는 순간
나보다 먼저 나를 받아 적는
저 뭉툭한 연필
삭제할 문장처럼
반달이 뜨고 진다
복효근, 산길
산정에서 보면
더 너른 세상이 보일 거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산이 보여주는 것은 산
산너머엔 또 산이 있다는 것이다
절정을 넘어서면
다시 넘어야 할 저 연봉들
함부로 희망을 들먹이지 마라
허덕이며 넘어야 할
산이 있어
살아야 할 까닭이 우리에겐 있다
조현자, 빨간 시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무작정 빨간 버스에 올랐다
사람들은 지금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지금 그에게로 간다
창밖으로 흐르는 팽팽한 시간 속에
내 그리움은 언제나 붉은빛이었다
빨간 우체통이 오장(五臟)을 흔들어놓는다
나는
달리는 버스에서 뛰어내려
우체통에 들어가 그에게로 배달된다
뾰족 지붕에
온통 빠알간 장미로 뒤덮여 있는 곳이
그가 사는 곳이다
서쪽 하늘 노을빛 스러지면
내 그리움도 닺을 내린다
꽃등에 불붙이자
빨간 순결(純潔)이 별처럼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