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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나는 시인이 되고싶었습니다.
게시물ID : gomin_87022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익명Y2Rla
추천 : 6
조회수 : 508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10/16 18:15:26
초등학교 3학년때 장래희망이 시인이었더라구요.
그이유가 거창하게도 어려운 사람들에게 시를 들려주고 싶다 였죠.
이사를 가면서 정리하던 짐속에서, 삭아가는 도화지 안에 그런 포부가 쓰여있었습니다.
발견한 저도 놀랐어요.내가 이런 생각을 했던 아이였나 낯설더라구요.
그리고 몇개 시도 끄적끄적 해두었더라구요. 그래서 찬찬히 읽다가 보니까 옛날일이 막 떠오르고 그러네요.
 
어렸을때 부터 꾸준하게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렸어요.
그때 시골집에 살아서 부엌이 안채랑 분리되어있던 구조였는데
엄마는 멍든 얼굴로 묵묵하게 부엌에 가서 설겆이도 하고 반찬준비도 했죠.
저는 작은방에 숨어있다가, 멀찍이서 그런 엄마를 물끄럼히 바라보곤 했어요.
 
아주 어렸을 때 부터 엄마가 혼자부엌에 있을때는 곁에  다가가지 않았어요.
혼자있으면 엄마가 숨을 참고 우실 수 있었거든요. 그걸 그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나는 너무 어렸고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울고있는 엄마를 보는게 괴롭기도 해서 항상 멀찍이 보고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어느날엔가 아버지가 크게 화가나서 어머니 얼굴을 마구 때린적이 있었어요.
가끔 발로 차거나 차려준 밥상을 뒤엎거나 한적은 있었지만
그렇게 미친사람처럼 엄마를 때리는 모습은 처음이라 손발을 벌벌 떨고 그걸 보고만 있었어요.
아버진 제 화에 자기가 미쳐서 안마당의 장독대까지 발로 차 부셔버리고 나가고, 엄마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 마당에 주저앉았죠.
내가 울면서 엄마에게 다가가니까 친할머니가 그제서야 방문을 열더니
[장독깨졌구나. 아깝게시리..]그런 말을 했었어요.
며느리가 아들에게 맞아서 피를 철철 흘리는데 고작 그 한마디 하고는 방문을 다시 닫더라구요
 
나는 왠지,너무 원통하고 두렵고 끔찍한 마음에 엄마에게 달려가서 엄마를 부둥켜 안고 울었는데
엄만 절 다독이시며 절뚝절뚝 일어나서 부엌으로 갔어요.
찢어진 얼굴을 물로 씻어내는 모습을 보니까 앞섶에 피는 번지고, 멈출생각도 안하고
나는 엄마가 꼼짝없이 죽는줄만알고 두려움에 한숨도 잘 수가 없었죠.
나중에야 이웃집아주머니가 밤에 엄마를 데리고 병원에가셨죠.
 
그리고 엄마는 오지않으셨어요.
2년동안.
그뒤에 고모들이 살림을 해주겠다며 지방에서 올라와 우리 집에 와있었는데 고모네 아이들이 저랑 제 동생을 참 많이 괴롭혔죠.
옷도 뺏어가고 어린 동생을 자꾸 놀려서 화나서 때리면 아버지에게 일러바쳐서
뺨을 몇번씩 맞으면서 작은방에 가두어진적도 있구요
그래도 몇개 남은 엄마옷가지에 배인 냄새를 밤마다 끌어안으면서
언젠간 엄마가 데리러 올꺼야
나랑 내 동생도 데리고 도망칠꺼야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렇게 살았어요.
 
엄마가 나가시고 돌봐주는 사람도 없어서 방학이 끝나고 개학한줄도 몰라 7일동안 학교를 안나가다가
학교에서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꼬질한 차림으로 학교에 갔죠.
그때가 초등학교 2학년때였는데 2학기들어서 담임선생님이 아침마다 빵하고 우유를 저에게 주셨어요.
받아쓰기도 거의 빵점아니면 1개맞추는 열등생이었는데 1학기때와 다르게 다정했죠.
숙제를 안해와도 벌서지 않게해주시고.
그래서 저도 그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마음 붙일곳 없어 숨죽이고 살았는데
밤에 잘땐 나도 모르게 울음이 나와서 벽을 보고 숨을 참으며 끅끅 울었던 기억이나요.
엄마 생각이 나면 눈물을 멈출 수 없는데 울면 아버지가 때리니까 숨어서 울다가 잤었죠.
그랬던 그때 그 선생님이 저한테는 구원이었어요.
 
그때부터 집에가기 싫어서 교실뒤에 책모아놓은 공간에
선생님 퇴근하실때까지 뭉그적 거리다가 같이 교실을 나가곤 했어요.
선생님은 교탁옆 선생님 책상에서 채점도 하고 뭐 서류도 쓰시곤 해서
전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그 책있는 공간에서 뭉그적거리다가 책을 읽게 되었죠.
그러다 보니까 동화책을 다 읽었고
받아쓰기도 백점을 받아보고..
일기를 써가면 선생님이 그 아래 자그맣게 써주는 의견에
"열심히 노력해서 기쁘다."이런거 써주시기도 해서
더 열심히 이것저것 썼어요.
 
그렇게 학교생활이 좋아졌을때 쯤에 엄마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할머니가 전화를 받으면 엄마는 암말 안하고 끊었다가
제가 받으면 숨죽여서 "딸, 엄마야"하고 말하신것 같아요
몇달만에, 간신히 통화하게 되었어요.
근데 고모가 그 전화받는 장면을 본겁니다.
전화를 휙 뺏더니 엄마목소리를 듣곤 야멸차게 전화를 끊어버리더라구요.
처음으로 악을 쓰고 달려들었는데 술먹던 아버지가 그런 제 배를 발로 찼어요.
동생이 울면서 아빠한테 빌고
할머니는 담배만 피우면서 마당에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는 저를 그저 보고만 있었죠
동생은 남자애라 그런지 날 울며 쫒아오는 애를 붙잡아 자기 무릎에 앉히고선 말이에요.
옆집 술꾼아저씨가 아버질 말리지 않았으면 더 크게 얻어맞을 뻔 했죠.
그래도 그 다음날 멍든 얼굴로라도 학교에 갔어요.
 
그런 몰골로 등교하니, 선생님이 빤히 제 얼굴을 바라보시다가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말하기 듣기 쓰기 그런시간이었는데 교과서도 안가지고 온거였어요.
가방을 암만 뒤져도 교과서가 하나도 없어서 눈물이 막 났어요
선생님한테 혼날꺼같고 미움받고싶지 않고
그렇다고 아빠가 내방을 뒤집어서 아무것도 가지고 올 수 없었다고 말하기도 싫었죠.
근데 선생님이 수업을 하시다가 전날 숙제로 쌓아둔 일기장을 모두에게 나눠주었어요
그리고 제것만 손에 들고 교탁앞에서 제 일기를 읽어주셨어요
그러면서 나처럼 일기를 바르게 쓰는 애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글씨도 제일 예쁘게 썼고, 내용도 훌륭하다고 했습니다.
눈물을 뚝뚝 떨구는 나를 일으켜세워 반아이들에게 박수를 치라고 했어요.
난생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박수를 받았어요. 애들은 우는 저를 보고 웅성거렸지만 박수를 오래 쳐주었구요.
선생님은 일기장을 돌려주면서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00는 시인도 될 수 있을거라고.
글을 이렇게 잘쓰니까
 
시인이 뭔지 그땐 잘 몰랐어요
그냥 글씨를 잘쓰고 고학년들이 시라고 지어놓은 액자속 그림과 짦은 글을 보고 그게 시라는것만 배웠었죠.
하지만 그때는 정말로 전율이 일었어요
시인이라는 말이, 너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야 라는 말처럼 들렸어요.
그래서 일기를 돌려받고 앉아서 눈물을 그치고 공부했습니다.
 
그뒤에 반 대표로 정말로 시를 써서 액자에 그걸 걸어 전시를 했고
상품도 받았어요.
시는 절 정말로 행복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과 헤어져 3학년이 되고도 시를 썼고
힘든사람을 위해 시를 쓰겠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아요.
사실 시가 나를 구원해주었다기 보다는
선생님의 애정, 혹은 동정이 나를 구원했다는 것이 정확하겠지만
그후에도 시인이라는 꿈이생기고 시를 쓰면서 정말로 특별한 경험을 많이하고
밝아졌으니까요.
 
나중에야 엄마가 떠나면서 제 담임선생님께 저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몇번 전화를 하며 왕래하던 사이라는걸 알게되었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나 감사한 일이죠......
 
추억에 잠겨서 쓰다보니까 글이 참 길어졌네요.
현재는 그꿈과 멀어져 살고있지만..
가끔씩 블로그에 시도 써보고 하고있어요.
글은 참 신기한게 쓸때마다 치유가 되는 기분이 들어요.
지금이 오래 묵혀두었던 글도 쓰며 울었지만 여기까지 오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네요.
 
..어떻게 마무리를 하나요. 하하..
지금은 뭐 행복합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헤어졌구요. 저랑 제 동생이랑 같이 살아요.
은사님 소식은 끊겨서, 아쉽지만.. 그래도 어디서든 저처럼 상처받은 아이들 잘 도닥이시며
이끌어주실것같습니다.
그 뒤로도 그분에 이어서 계속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 훌륭하게는 아니더라도 떳떳하게 살고있습니다.
ㅎㅎ
이렇게 두서없는글 참고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모두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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