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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GUUanY7ku9Q
이해원, 역을 놓치다
실꾸리처럼 풀려버린 퇴근 길
오늘도 졸다가 역을 놓친 아빠는
목동역에서 얼마나 멀리 지나가며
헐거운 하루를 꾸벅꾸벅 박음질하고 있을까
된장찌개 두부가 한껏 부풀었다가
주저앉은 시간
텔레비전은 뉴스로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핸드폰을 걸고 문자를 보내도
매듭 같은 지하철역 어느 난청지역을 통과하고 있는지
연락이 안 된다
하루의 긴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졸음이 한 올 한 올 비집고 들어가 실타래처럼 엉켰나
헝클어진 하루를 북에 감으며 하품을 한다
밤의 적막이 골목에서 귀를 세울 때
내 선잠 속으로
한 땀 한 땀 계단을 감고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
현관문 앞에서 뚝 끊긴다
안 잤나
졸다가 김포공항까지 갔다 왔다
늘어진 아빠의 목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힘이 없다
이현우, 달빛과 도둑
동으로
서로
달빛 따라 흐르다가
어쩌나
나는 도둑이 되었네
깜박이던 사랑마저 갇혀 있는 밤
가끔씩은 뭇별도 땅에 내려와
막다른 골목으로 숨어 드나니
풀벌레야
억새꽃 너울처럼 밀려오는 것들아
여전히 낯설고 먼 이름 앞에서
담을 넘고
정원을 기어
창가에 스쳐가는 바람이 되어
우수수
종려나무 잎사귀나 흔들고
마침내는
혼자서 돌아오는
아
나는 가엾은 도둑
김형술, 마라도
섬이 있네
바람에 바다가 마르고
눈물이 다시 바다를 메워
끊임없이 파도가 오는
섬이었네
흔들려도 눕지 못하는 나무와
남몰래 피고 지는 꽃지천인
깊은 바다 작은 영토
내 안에 아무도 찾지 못하는
섬이 있었네
이제 알겠네
김행숙, 진흙인간
주근깨 투성이 네 얼굴이 깜깜해진다
뙤약볕 속에서 마지막 특징이 사라지는 순간에 네가 보였다
특징이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아는 체를 할까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아는 얼굴이었다
마음이 아주 복잡해졌다
너를 본 후 내 마음이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임성용, 아내가 운다
막걸리를 마시고
아내가 운다
적금 통장과 육십 만원 월급을 내놓고
혼자, 새벽까지 운다
나는 그 울음 곁에 차마 다가설 수 없다
눈물을 참으라고 등 다독이며
함께 울어주거나 손수건을 건넬 수 없다
그것은 너무 뻔한 위선이라서
말없이 이불을 쓰고 잠자는 척 한다
미안하다는 말이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자는 말이
더 불행한 약속임을 왜 모르겠는가
애초에 나 같은 사람 만나지를 말지
억지를 부리면 부릴수록
하나씩 부러지는 아내의 뼈
진짜 아픈 건 뼈마디에 도사린 꿈이다
울음 눈물 참고 죽을 때까지
허약한 꿈을 믿고 산다는 건
얼마나 무서운 악몽인가
차라리 악다구니를 쓰고 멱살을 잡고
집을 뛰쳐나가 끝장을 내는 것 보다
밤새 흐느껴 운 아내가
씽크대 서랍에 약봉지를 숨겨놓고
또 아침이면 일하러 나갈 때
나는 솔직하지 못한 그 꿈이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