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학, 에델바이스
초승달이 설산(雪山) 높이에서
눈보라에 찌그러지면서 헤매는 것
내가 얼마만큼이라도
너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증거다
창문보다 높은 골목길
발자국이 뜸한 새벽녘
설산 어딘가에 솜털 보송한
네가 있다기에 나는 아직도
붉은 칸 원고지에 소설을 쓰는 거다
너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
너와는 이루어지는 소설을 쓰는 거다
곁에 있던 네가 내 안으로 들어와
이룰 수 없는 꿈을 같이 꾸는 거다
강영란, 그리움의 깊이
우물 하나 있습니다
오래 전에 던진 돌멩이
아직도 바닥에 닿지 못했습니다
최정아, 냄비
한낮이 달아오른다
폐지로 가득한 리어카에 노인이 매달렸다
낡은 리어카는 노인의 밥 냄비
방울방울 흐르는 땀으로 밥을 짓는 중이다
오르막길에서는
거듭, 입 밖으로 김이 뿜어져 나온다
쉽게 끓어오르는 양은냄비처럼
뜸들이지 못한 노인의 꿈은 금세 식어버리고
허기로 가득 찬 냄비 속
접힌 상자와 폐품이 들썩들썩 바퀴를 따라 구른다
머리 위로 날아가는 제트기 소음에
숨은 더 가빠오고 뒤따르는 바퀴자국처럼
하늘에 두 갈래의 길이 생겼다
잡지 못할 길은 아득하고
넘어야 할 언덕은 코앞에 있다
한 그릇 밥이 될 폐지들이 굽은 등을 다독인다
쇄골 깊숙이 지친 숨이 고인다
목구멍이 뜨겁다
임동윤, 흐르는 산
내 마음의 산 하나 있다
다가서면 멀리 달아나는 산
만질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산
그 산으로 달려가면
내 속엔 늘 새로움이 하나
또 다른 마음이 하나
그 속의 크고 높다란 산
그리고 보이지 않는 숲과 계곡
그 속에서 나는 흔들렸다
흔들리면서 바람이 되었다
눈먼 별이 되어 반짝거렸다
반짝거리면서 허공을 달려갔다
다가설수록 더 멀리
달아나는 산, 강물 같은 산
만질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내 마음 속의 산 하나 있다
함민복, 세월
문에 창호지를 발라보았지요
창호지를 겹쳐 바르며
코스모스 꽃무늬도 넣었지요
서툰 솜씨에
울어 주름질 것 같은 창호지
햇살에 말리면
팽팽하게 퍼졌지요
손바닥으로 두들겨보면
탱 탱 탱 덩 덩 덩
맑은 북소리가 났지요
죽고 싶도록 속상하던 마음도
세월이 지나면
마음결 평평하게 퍼져
미소 한 자락으로 떠오르기도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