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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는
둥글다네
나는 그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를 좋아한다네
사람이 사람을 앉히고 발톱을 깎아준다면
정이 안 들 수가 없지
옳지 옳아 어느 나라에선
발톱을 내밀면 결혼을 허락하는 거라더군
그 사람이 죽으면 주머니 속에 발톱을 넣어 간직한다더군
평생 누구에게 발톱을
내밀어보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
단 한번도 발톱을 깎아주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
발톱을 예쁘게 깎아주는 사람은
목덜미가 가늘고
이마가 예쁘고 속눈썹이 길다더군 비가 오는 날이면
팔베개도 해주고 지짐도 부쳐주고 칼국수도 밀어준다더군
그러니 결혼을 안할 수가 있겠어
그러니 싸움을 할 수가 있겠어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는
고양이에 가깝고
공에 가깝고
뭉쳐놓은 것에 가깝다네 그는 가장 작고 온순하다네
나는 그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를 좋아한다네
이윤학, 그날의 민들레꽃
영안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웃음이 멎기만을 기다렸다
화단으로 돌아서서 담배를 피웠다
민들레, 민들레, 민들레
노란 꽃판을 바라보았다
쩌개진 빨래방망이를 들고 쫓아오는 마누라를 피해
들입다 뛰는 노름꾼을 보았다
그를 따르는 살이 찐 어미 발바리를 보았다
마누라 뒤를 따르는 새끼 발바리들을 보았다
밥 먹다 말고 마당가에 나와
손뼉을 치는 새끼들을 보았다
저녁연기
물오른 밤나무동산을 감고 있는 걸 보았다
얇은 판자때기 선반을 두르고 있는 걸 보았다
풀숲에 퍼질러 앉아
가랑이 사이에 고개를 숙인 사람
담뱃불을 이어 붙이던 사람
민들레, 민들레, 민들레, 뿌리를 씻어
오지게 씹어 먹던 간암말기환자를 보았다
최정아, 바겐세일
반값이란다
신발도 핸드백도 반값이라고
외치는 판매원이
서둘러 딸을 시집보낸 아버지처럼 보인다
신어보고, 메어보고
이미 전단지로 뿌려진 반 생
누군가의 손에 들린
구두코가 서럽다
반값이 되기 전에 서두르라고
세상은 다그치지만
꼭 입을 다문 핸드백속에는
네 발을 가진 짐승의 일생이 요약되어 있을 것이다
저 가죽의 무게는
서둘러 떠나간 목숨의 값
뜨거운 울음이 담긴 핸드백 속 깊이를
가늠하기엔
너무 화창한 날이다
이재무, 평상
땀내 나는 가장을 벗고
헐렁한 건달로 갈아입는다
누워 부르던 노래들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
앉아 듣던 슬픔들은
기꺼이 생의 거름 되어주었고
엎드려 읽고 쓰던 말들은
나무와 꽃이 되었다
안방에서 엄하시던 아버지도
더러 농을 거셨고
부엌에서 근심 잦던 엄니도
활짝 웃곤 하였다
졸음 고인 눈두덩 굴러
머리맡에 낙과처럼 떨어지던
저녁 종소리 우련하다
권현형, 최초의 방
식물들이 나를 버릴 수 없어
썩은 뿌리로라도 살아 있었다
단 한 줄기의 강낭콩처럼 살아 있던 방
불면이 싹을 틔우고 잎을 기르고 무성하게 벽을 덮던 방
나를 기르는 식물들이 나 대신 깊고 푸른 잠을 잤다
책상이 밥상이고
밥상이 책상이고 습기에 젖은
책 냄새가 살 냄새 대신 방안 가득 떠다니던 그곳에서
베개를 껴안고 가난한 몸이 달아오르던 방
내 몸이 내게 가장 뜨거웠던 성채
그림자가 일어나 느릿느릿 세수를 했다
바닥에서 길어 올린 쌀로 한 끼 밥을 짓던
그림자까지 살아 있던
뼛속까지 나였던, 바로 거기로 언젠가 돌아가리라
자존심 드높은 긍휼로, 나의 자취방으로, 최초의 방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