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표, 저녁의 표정
아직 끝나지 않은 어제의 노래
둥글게 뭉친 눈덩이를 허공의 감정이라고 말할 때
돌멩이 같은 내일이 아이스크림처럼 녹는다
깊게 파인 공중에서 밤이 태어나고
눈덩이의 부피만큼 훌쭉해진 허공은 너무 질겨서 삼킨 사람이 없다
바삭거리던 나뭇잎이 공중에 몸을 밀어넣을 때
저기 새가 날아가네
서쪽으로 기운 나무는
그것을 천 개의 손가락을 가진 바람의 연민이라고 말한다
바람이 남긴 죽은 새들과 함께
수런수런 모여드는 저녁
남은 허공을 쥐어짜면 새들의 울음이 주르르 흘러내리기도 하는
여기는 바닥에 노래가 새겨지지 않은 곳
표정 없이 자전거 바퀴살에 감겨 헛도는 하늘처럼
김연성, 베로니카의 사랑
그러니까 누가 베로니카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인가
언제부터 내가 베로니카를 사랑하게 된 걸까
만난 적도 본 적도 없는 베로니카는
그러니까 언제부터 내 안에 오도카니 앉아있었나
치렁치렁 춤추는 검은 머리카락의 향기를 맡은 적도
슬픈 듯 젖은 듯
폐광 같은 눈동자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데
그러니까 내가 베로니카를 몹시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다, 아니다
나는 베로니카의 겉모습만 사랑하고 있을 뿐
이번 생에는 그 얇은 떨림까지 훔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렇다면 굳이 베로니카를 만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베로니카 혼자, 나를 사랑하면 족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김미선, 아버지 풀 되어
불초여식
이 핑계 저 핑계로
찾아뵙지 못하고
세월 넘겨 찾아뵈오니
아버지 풀 속에 누워 계시더라.
풀들과 아주 친해져
본척만척 하시더라
풀세상에서 이생의 모든 업
다 풀고 풀되어 사시더라
풀, 나비, 새, 온갖 꽃들과 놀고
바람하고도 아주 친해지셨더라.
못내 섭섭하여
모퉁이 돌아서서 훌쩍거리며 울었더라
이제 걱정 안 해도 되겠더라
소복소복한 풀들 울타리 되어
이웃 하고 계시더라
김록, 시차
나무에 매달리는 열매여
나무도 열매에 매달린다
나무에서 나온 빛이 열매로 보이려면 얼마나 걸리는가
옛날 얘기는 왜 옛날 얘기가 아닌가
하늘에 속한 것이 땅에 매달릴 때
8분 전이 지금인 때
어떤 것에 늘 마음이 쏠리는가
어떤 것을 잊지 못하는가
어떤 것에 매달리는가
왜 옛날 얘기를 지금 해도 되는가
하늘에 떠 있는 것 중 오래전에 죽은 것도 있어서
오래전이 지금인 때
1초 전 지금
열매가 떨어진 뒤 얼마 뒤에 보러 가는가
이해인, 내 안에서 크는 산
좋아하면 할수록
산은 조금씩 더
내 안에서 크고 있다
엄마
한 번 불러보고
하느님
한 번 불러보고
친구의 이름도 더러 부르면서
산에 오르는 날이 많아질수록
나는 조금씩
산을 닮아 가는 것일까
하늘과 바다를 가까이 두고
산처럼 높이
솟아오르고 싶은 걸 보면
산처럼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그냥 마음이 넉넉하고
늘 기쁜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