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란, 소가 혀로 풀을 감아올릴 때
수굿하게 고개 숙이고
상냥한
콧김
입김
땅에게 바싹 절하고
조심조심 혀로 풀을 감아 올린다
뜯어먹어 미안하고
상처 냈으니 미안해서
침을 한번 쓰윽 묻혀준다
때로 몸의 상처는 침도 약이 되어서
온 들판에 풀들이 새로 돋아난다
송종찬, 겨울강
꽁꽁 얼어붙은 북한강이
온몸을 받아낸다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더니
강심(江心)까지 얼어붙었다
돌을 던져도
소리치지 않는 저
단단한 내공
상처의 두께 더하다 보면
나도 세상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맺힘과 풀림을 반복하는
강 끝에서 들려오는
뿌리들의 먼 추임새 소리
남진우, 월식
달을 따기 위해
지붕에 사다리를 걸어 놓고 올라간 아이와
달을 건지기 위해
두레박을 타고 우물 속으로 내려간 아이가
이 밤
저 달에서 만나 서로 손을 맞잡는다
우물에 떠 있는 달 속으로
지금 막 올라간 아이가
달을 따 들고
지붕 밑으로 내려온다
이시영, 어머니 생각
어머니 앓아 누워 도로 아기 되셨을 때
우리 부부 외출할 때나 출근할 때
문간방 안쪽 문고리에 어머니 손목 묶어두고 나갔네
우리 어머니 빈집에 갇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돌아와 문 앞에서 쓸어내렸던 수많은 가슴들이여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자장자장 우리 아가
나 자장가 불러드리며 손목에 묶인 매듭 풀어드리면
장난감처럼 엎질러진 밥그릇이며 국그릇 앞에서
풀린 손 내미시며 방싯방싯 좋아하시던 어머니
하루 종일 이 세상을 혼자 견딘 손목이 빨갛게 부어있었네
이규리, 커다란 창
창이 큰 집에 살면서 오히려 창을 가리게 되었다
누가 이렇게 큰 창을 냈을까
이건 너무 큰 그리움이야
창을 건물의 꽃이라 했나
막힌 곳에서도 누구나 창 하나씩 내고 있으니
간절히 뚫고 싶었던 건 어둠이었을까
제 안에 하루에도 수십 번 저를 뚫어야 하는 명암이 있어
어느 날은 그 창으로 꽃을 보았다 말하겠지
어느 날은 그 창으로 비참을 보았다 말하겠지
왜 창 앞에 그토록 자주 저를 세웠을까
돌아보면 거기 늘 누군가의 눈이 있었다고 말해도 될까
창이 왜 낮에 바깥을 보여주고 밤엔 자신을 보게 하는지
그 심연
살아있어 창을 낸다면, 다시 창을 낸다면
한 그리움 정도의 크기만 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