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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전쟁]조선수군의 활약이 전세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을까
게시물ID : history_86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흐미나
추천 : 5/9
조회수 : 1341회
댓글수 : 17개
등록시간 : 2013/05/01 22:49:32

조일전쟁에서 일본군을 물리칠수 있었던 이유

 

한국 사학자들은 대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조선수군이 일본의 서해안 해상보급로를 차단하였기에 일본군은 물자부족현상을 겪게되고

 

전쟁을 지속할수 없고 남하할수 밖에 없었다  라고요

 

저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이러한 상식에 대해 반박을 해보고자 합니다.

 

충분한 논리적 근거를 토대로요.

 

여러분들 그점은 아시고 계십니까? 조선수군은 명량해전을 제외하고는 단 한차례도 일본수군에 비해 병력의 열세에서 싸운적이 없었다는걸요

 

명량해전도 우리가 알고있는 13 vs 133척이 아니라. 13척 + 포작선 40여척  vs  133 척(이 수치에는 일본군의 아주작은 협선과 고바야급 선박도 포함)

 

실제로 병력의 비율로 따지면  조선군이 명량에서는 열세이기는 하나 우리가 알고 있는 만큼의 10분의 1의 비율이 아니라. 일본군이 대략 1.5배~ 2배

 

가량 이었다는 사실 (이점을 인정하지 못하신다면 댓글로라도 반박해드림  지금은 이것이 주제가 아니기에)

 

조선 성종때 경국대전에는 조선의 수군에 대한 대목이 나옵니다. 병력 4만 8천여명에 크고작은 병선 도합 740여척 상당한 규모의 군대이죠

 

조일전쟁때 일본수군의 병력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임진년때 건너온 일본군 16만 대군중 수군의 규모는 9천여명  정유년때 건너온 14만 대군중

 

수군의 규모는 대략 7천여명 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수군의 규모는 어떠하였을까요?  경국대전에 나온 편제로는 조선수군은 5만여명에 달하는 대군이지만 실제로 군역의 문란

 

정치의 문란으로 인해 조일전쟁 당시에는 그에 턱없이 모자라는 병력이 존재했죠.

 

임진년 6월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은 이억기의 전라우수군과 합류합니다. 거기에 원균이 이끌고 있는 패잔병에 충청수군까지 가세하여

 

대략 1만 5천에 달하는 삼도수군연합함대가 결성되죠 사실상 이 함대가 당시 조선수군의 전부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편제의 3분의 1에도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죠 ? 그만큼 조선의 군역이 문란했다는 것이겠죠

 

당시 조선수군은 경상 우수영에 1만여명 경상좌수영에 1만여명 전라 좌우수군 각 5~6천여명 그외 충청수군

 

경기도와 평안도에도 적은 규모나마 수군이 존재  //  이순신과 이억기는 타 수군절도사 보다 일찍부임하여 군비를 잘 관리 하여

 

편제상의 병력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네요

 

제가 반박을 하고자 하는 주제는 이것입니다.  일본수군의 역할이 과연 서해안을 통한 해상보급의 역할이었냐는 것이죠

 

제가 연구한 바로는 일본수군의 역할은 부산포 - 대마도 - 규슈 로 이어지는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부산항인근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결론을

 

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날짜는 음력날짜이므로 대략 +1달 정도로 하여 양력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한건 4월 14일 입니다. 그리고 한양에 입성한 때가 5월 초로 개전 20일 만이죠  그런데 이순신의 최초 전투는 5월 7일

 

거제도 옥포만에서의 전투입니다. 개전이후 대략 3주가 지나서 일본군과 처음으로 맞닥뜨린거죠 여기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이순신의 전투기록을 보면 5월 7일 첫 전투가 시작 되었고  6월 3일에는 이억기함대와 합류 그후 원균 함대까지 합류하여  연합함대를 구성

 

6월 7일 까지  총 2차 간의 출전으로 6~7곳의 전장에서 일본군을 격파 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6~7곳의 전장에는 일본군 수군이 뿔뿔히 흩어져

 

있었어요 불과 10~15척 규모 (그것도 작은 선박까지 포함) 로 불과 수백에 지나지 않는 함대로서 조선수군 연합함대와 전투를 치르기에는 턱없이

 

초라한 규모이죠  여러분들은 의문스럽지 않나요 ? 애초에 서해안을 통하여 해상 보급을 할 목적이라면 일본수군이 조선으로 건너온 직후부터

 

함대를 규합하여 서진을 해야하는데 4월 14일 개전후 6월 7일 까지도 일본수군은 거제도 인근 포구에 소규모로 나뉘어서 주둔하고 있었죠

 

이순신의 1~2차 출전에서 가장 서쪽에 근접한 일본군을 상대로 싸운곳이 사천선창에서의 전투이니  개전한지 50일이 지난 그 시점까지도

 

일본수군은 거의 거제도 인근에서만 소규모로 나뉘어서 우물쭈물 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던 일본군이 조선수군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싸운 첫 전투가 한산도전투로 7월 8일의 일이죠  한산도해전에서 패한후 일본수군은 조선수군과의 전투를 피합니다. 조선수군과 전투를 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일본수군은 부산항 내에 정박하며 부산항 수비만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었죠

 

한산도 해전이후 일본군은 조선수군의 도발에 응하지 않았고 부산포 수빈만을 하였고 조선수군은 8월 29일 ~ 9월 1일 까지 부산포  일본군 본진을

 

공격하게 되었죠.  일본수군은 동천(부산항에서 북쪽으로 내륙깊숙히 들어간 하천) 에 군선을 숨기고 부산포와 자성대에 쌓은 왜성에서 포 사

 

격으로 대응하였고 미쳐 숨기지 못한 일본군 전선 100여척이 격침되었습니다.

 

1차 출전  2차 출전(연합함대구성)  3차출전 (한산도) 4차 출전(부산포)  여기 까지의 전투중 사실상 해전다운 해전은 한산도 해전 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전투야 일본수군이 소규모로 나뉘어있는 상태였고   부산포해전의 경우도 일본군이 일방적으로 전투를 회피했죠

 

1~4 차 출전은 임진년 4월 14일 부터 9월 1일까지 대략 5개월 간의 과정이고 여기에서의 일본수군의 행적을 보면 일본수군을 애초에 서해안으로 서진

 

하여 해상보급을 할 의도가 없었다고 보는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개전초기 육상에서의 사건을 보죠  

 

4월 14일 소서행장이 부산포에 상륙합니다. 5월 초 한양을 함락 개전 2달만인 6월 중순 (지금으로 치면 7월쯤으로 한여름철)평양을 함락시킵니다.

 

소서행장이 평양을 함락시킬 때 기록을 보면 양곡 10만섬과 군수물자가 다수 있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소서행장의 선봉대에 뒤이어 구로다 군의

 

부대까지 연달아 평양에 입성함으로서 평양 주둔 일본군의 병력은 대략 3만여명 규모로  불어났습니다.  충분한 식량을 보유한 상태이고

 

한여름철이었으니 최소  가을철 까지는 전투를 진행할수 있었다고 하면  추위와 보급의 부족으로 평양까지 진격한 일본군이 의주까지 진격 하지 못한

 

이유가 없다고 보입니다. 당시 조선군은 한강방어전 임진강 방어전 평양성 방어전에서의 실패로 인해 병력과 물자를 많이 잃은 상태였고

 

조선군 자력으로 일본군의 의주 진격을 막을 능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평양성에는 고니시와 구로다의 군이 주둔했었고  이듬애 1월 조명

 

연합군의 평양공격에서 조선군이 1만여명 동원되었으니 일본군에의해 평양을 함락 당한 시점의 조선군의 규모는 더 적었을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볼때에는 당시 일본군이 의주로 진격하지 못한 이유는 명나라의 개입을 두려워 했던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6월 중순 평양성을 함락시켰고  명나라의 선발대 조승훈은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7월 초 압록강을 건너 7월 중순 평양을 공격하였다가 패퇴합니다.

 

일본군으로서는 2달만에 평양까지 진격하였으나  전라도 공격에 실패하였고 평양 이남 지역의 점령지에 대해서도 완전히 통치력을 굳힌 상황이

 

아니였으니 평안도에서 최대규모로 물자가 풍부한 평양에서 진격을 멈추고 평양 이남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다진 후 명나라와의 결전을 준비하려

 

했던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의주까지 진격을 하게된다면 명군이 개입을 안할수가 없는 상황이 되지 않을까요 ?  명나라 영토로 진입하는 길목이니

 

일본으로서도 명국과의 교전에 있어서는 신중을 기할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비록 히데요시가 명과 천축국까지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조승훈의 패퇴후 명군은 이여송은 사령관으로 5만의 대병력을 파병하여 임진년 12월에 압록강을 건너 이듬해 1월 중순 조선군과 연합하여 평양을

 

탈환하게 됩니다.

 

 

 

지금 까지의 전투상황에서 결론을 내어보면  조선수군이 일본군의 서해안 진격을 차단하여 일본군의 해상보급을 계획을 막았기에

 

일본군이 북상하지 못했다는 식의 논리는 맞지 않다 라고 결론을 낼수 있습니다.

 

그러면 정유재란때의 조선수군의 역할에 대해서 설명해 볼까요 ?

 

임진년 9월 초 부산포 해전을 끝으로 1597년 7월 중순 칠천량 해전때 까지 대략 4~5년 간은 조선수군의 이렇다 할 전투가 없습니다.

 

일본군이 해전을 기피했고 조선수군의 전력이 육상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공격한다거나 부산포 일본군 본진을 공격하여 탈환할 전력이  못되었던 거죠

 

이제 정유년때의 칠천량 해전때로 가봅시다.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의 90% 이상이 수장당하여 사실상 조선수군은 재기 불능의 상태가 됩니다.

 

칠천량에서 일본수군은 사활을 걸고 조선수군과의 결전을 치뤄 승리했죠 ?  그렇다면 이것으로 일본수군이 서해안으로 진격할 의도를 가졌다고

 

볼수 있나요 ?  제가 추측한 바로는 정유재란때 일본군은 임진년때와 마찬가지로 서해안으로 서진하여 해상수송할 생각이 없었던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정유재란때는 일본군의 작전계획이 바뀌었습니다. 임진년때처럼 빠르게 북상하여 조선의 왕을 사로 잡거나 수도를 함락시키겠다 는 것이 아니라.

 

경상도 전라도 부터 점령하여 굳건히 다지면서 충청도 경기도 이렇게 차례차례 북상해 나가는 전략을 실행했습니다. 그래서 개전초기부터

 

9만의 대군을 동원해 진주성을 점령하고 연이어 남원 전주 등 전라도 고을을 복속시키죠  이런식의 전략이었기에 서해안으로 해상 수송을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칠천량 해전이 7월 중순  그 다음 의 명량해전은 9월 중순 거제도 해안인 칠천량에서 조선수군 90%이상을 수장시켰고

 

조선수군 패잔병은 뿔뿔히 흩어졌는데 그 일본수군이 명량 해협까지 도달한건 2달 후 인 9월 중순입니다.  불과 사나흘 뱃길이면 충분할 거리를

 

2달이나 걸렸죠 ?  게다가 이순신이 유명무실해진 조선수군을 재건할 2달간의 기간을 줬다는 것입니다. 왜 칠천량 전투 이후 명량해협에  접근하기까

 

지 두달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요 ? 이유는 간단합니다. 서진할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칠천량에서 조선수군을 상대로 싸운건 조선수군을 궤멸시켜야 부산포 를 쉽게 지켜 낼수 있고 부산포는 개전이후 일본군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보급기지였기에 이 곳을 잃어버린다면 퇴각로를 확보하기 어렵고 물자보급에 있어 엄청난 차질을 빚게 되거든요

 

실제로 노량해전에서 소서행장의 퇴각로를 차단한 조명연합수군때문에 일본군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며 구사일생으로 본국으로 돌아갈수 있었죠

 

엄청난 희생을 내고요.

 

글의 순서에는 안맞지만 또 한가지 얘기를 더하죠

 

임진년 개전 당시 조선수군 연합함대가 결성되었을때 규모가 1만 5천여명에 달했습니다.

 

그 이후 병력증강을 하여 전성기때에는 이순신의 삼도수군함대의 규모가 2만여명에 달했다고 하더군요

 

반면에 일본수군의 병력은 임진년때는 9천여명 정유년때는 7천여명 수준으로 조선수군에 비해 병력면에서도 열세였고요

 

실제로 함선의 규모나 성능에서도 일본수군이 열세였어요 (작고 빠르다는점만 빼면)

 

일본에서 전쟁을 준비하면서 간자들이 조선팔도를 누비며 정탐을 했을텐데 조선수군의 개략적인 규모조차도 파악하지 못했을까요 ?

 

제가 볼때에는 일본측에서 조선군 전체의 규모와 배치 에 관한건 대부분  개전초기때 부터 알고 있었다고 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수군의 병력을 조선수군에 비해 열세인 규모로 출정시켰죠

 

조선수군의 규모와 전력을 충분히 경험한 후인 정유재란때도요

 

그것 또한 일본수군이 서해안으로 서진할 계획이 없었다고 볼수 있는 근거가 아닐까요 ?

 

 저는 조일전쟁에서 수군 전투를 비중있게 다루는것에 대해 큰 불만입니다.

 

전략적으로 육상에서의 전투가 큰 의미를 가질수 밖에 없는 전쟁인데

 

 왜 수군간의 전투를 더 비중있게 다루나요 ?

 

당시 일본군은 16만 병력중 수군이 9천여명으로 전체의 10%로 채 안되었고요

 

조선군의 경우는 전체 규모가 크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수군의 규모가 큽니다만

 

명나라의 경우도 이여송의 선발대의 규모가 4만여명이었지 임란 정유난 내내 대략 10만여명의 병력을 조선에 상시 주둔시킨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유재란때 최후의 사로병진 작전에 투입된 명군이 기록상 10만명이 넘네요

 

 그 10만이 넘는 사로군 중에 수로군인 진린의 수군은 불과 1만도 안되는 병력이었어요 5~7천 가량으로 보더군요

 

 

조선은 반도입니다. 수군의 역할은  일본군이 상륙하지 못하게 하는것 외에는 큰 의미가 없어요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이후로는 수군보다는 육군의 역할이 더 크고 비중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순신장군을 깔려고 하는것이 아닙니다.

 

행정상의 큰 폐단에도 불구하고 편제상의 병력을 충분히 유지해온점 그것만 해도 당대의 무관으로서는 엄청나게 뛰어난 능력으로 볼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의 사학계가 지나치게 이순신을 과대평가하면서

 

부풀려진 사실이 많습니다.

 

우리가 잘못알고 있는 것 처럼 이순신은 열세의 위치에서 우세인 적과 싸워 이긴것이 아니라.

 

싸우기 전 부터 우세를 점하고 열세인 적과 싸워 이긴것이죠

 

그리고 그 우세를 점할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 혼자만의 능력이 아니라.

 

고려 최무선 이후로 이어져온 함대함 포격전의 전술

 

조선 중기 이후 개량된 판옥선이라는  전선

 

수군을 중요시 여겨 대규모의 편제로 구성된 조선수군

 

홈 그라운드라는 지리적 잇점

 

이 모든것이  원칙주의자 이순신을 도왔기에 가능했던 것 입니다.

 

이순신은 열세의 위치에서 우세의 적과 싸워 이기는 재주를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고려후기 이후로 쌓아져온 위의 장점들이 이순신을 도왔던 것이고

 

이순신은 단순히 원칙을 중요시 하는 평범한 장군에 이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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