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헌, 어머니가 쓴 시
어머니
머리에 보자기 두르고
학교 오시던 날
누런 보리밭 옆 운동장으로
5월 하늘 새까맣게
무너지던 오후
더 이상 나는
집으로 돌려보내지지 않았다
쪽 풀린 어머니의 검은 머리칼
서울 와서
가발공장 여성노동자
데모에서 보았다
평생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수업료
그때
어머니 전 생애를 잘라
조용히 머리에 두른 것이다
김사인, 아카시아
먼 별에서 향기는 오나
그 별에서 두 마리 순한 짐승으로
우리 뒹굴던 날이 있기는 했나
나는 기억 안 나네
아카시아
허기진 이마여
정맥이 파르랗던 손등
두고 온 고향의 막내누이여
이재무, 간절
삶에서 '간절'이 빠져나간 뒤
사내는 갑자기 늙기 시작하였다
활어가 품은 알같이 우글거리던
그 많던 '간절'을 누가 다 먹어치웠나
'간절'이 빠져나간 뒤
몸 쉬 달아오르지 않는다
달아오르지 않으므로 절실하지 않고
절실하지 않으므로 지성을 다할 수 없다
여생을 나무토막처럼 살 수는 없는 일
사내는 '간절'을 찾아 나선다
공같이 튀는 탄력을 다시 살아야 한다
나희덕, 식물적인 죽음
창으로 빛이 들면
눈동자는 굴광성 식물처럼 감응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빛이 희미해져 갈 때마다
숨소리는 견딜 수 없이 가빠졌다
삶의 수면 위로 뻐끔거리는 입
병실에는 그녀가 광합성으로 토해놓은 산소들이
투명한 공기방울이 되어 떠다녔다
식물에 가까워지고 있는지
공기방울에서는 수레국화 비슷한 냄새가 났다
천천히 시들어가던 그녀가
침대 시트의 문양처럼 움직이지 않게 되었을 때
빛을 향해 열렸던 눈과 귀가 닫힌 문처럼 고요해졌을 때
이제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도 사물도 아닌, 그 누구도 아닌, 오로지
한 떨기 죽음으로 완성된 그녀
죽음이 투명해질 때까지
죽음을 길들이느라 남은 힘을 다 써버린 사람
모든 발걸음을 멈추고
멀리서 수레국화 한 송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윤학, 푸른 자전거
어둠이 내릴 때 나는
저 커브 길을 펼수도
구부릴 수도 있었지
저 커브 길 끝에
당신을 담을 수도 있었지
커브 길을 들어 올릴 수도
낭떠러지로 떨어뜨릴 수도 있었지
당신이 내게 오는 길이
저 커브 길밖에 없었을 때
나는 어디로도 가지 못했지
커브 길 밖에서는 언제나
푸른 자전거 벨이 울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