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인태, 혼자 먹는 밥
찬밥 한 덩어리라도
뻘건 희망 한 조각씩
척척 걸쳐 뜨겁게
나눠 먹던 때가 있었다
채 채워지기도 전에
짐짓 부른 체 서로 먼저
숟가락을 양보하며
남의 입에 들어가는 밥에
내 배가 불러지며
힘이 솟던 때가 있었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건
삶을 같이 한다는 것
이제 뿔뿔히 흩어진 사람들은
누구도 삶을 같이 하려 하지 않는다
나눌 희망도, 서로
힘 돋워 함께 할 삶도 없이
단지 배만 채우기 위해
혼자 밥 먹는 세상
밥맛, 없다
참, 살맛 없다
유종인, 풀
무덤까지 와도 막히는 풀이 없다
묏등이 한 번 솟은 후에
다시금
초록을 들어 올려주니까
풀은 언제까지나 무덤을 쓰다듬는 노래니까
지구 땅 별에서 손을 뗀 적 없는
늘 푸른 집착이니까
주검보다 드센 곳에
하얀 풀뿌리가
높으니까
김진완, 푸른 귀
주차장 시멘트 터진
틈새로 잡풀 돋았다
내 사는 변두리가
우주 배꼽이 되고
우주 한가운데 돋은
풀은 푸른 귀가 된다
귀를 잡고 들어 올리면
네 발을 얌전히 모으고
대롱대는 강아지를
가만히 떠올려 보자
풀포기 잡고
살살 힘주면
앙증맞은 행성하나
아프다고 낑낑댄다
이화은, 이명
나의 신은 언제나 왼쪽 귀로만 온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편애에 익숙한 그는 왼손잡이인지도 몰라
사륵 사르르
긴 옷자락을 끌며
하루도 빠짐없이 전례처럼 그가 다녀가고
내 왼 귀는 그래서 종교적이다
지극히 도덕적이다
오른 귀의 낭만과 사철 부는 바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좌우의 기류가 풀 멕인 하늘처럼 팽팽한 날
그런 날은
성난 신의 발자국 소리가 더욱 거칠어진다
데칼코마니 같은 내 몸의 경계에는
반절짜리 연애가 산다
절반쯤 달려가다 돌아오고 돌아오는
슬픈 연인이 산다 그래도 모른 척 신은
왼쪽 귓속에 더 깊은 소리의 동굴을 파고
사르륵 사륵
오늘 밤도 내 왼쪽 귀는 거룩한 순교를 꿈꾸며
신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든다
한서정, 폭설
참았던 이야기다, 끝끝내 못다한 말
다 못쓰고 떠났던 말, 이제 와서 쏟아낸다
전부를 받아 달라며 온 몸으로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