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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NxRndXRFNMI
이건청, 저무는 날이 다가와
말이 한 마리 쓰러지고 있다
뒷무릎이 꺾이고 서서히
앞다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긴 목을 흔들고 있었다
재갈이 물려 있었다
갈기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다급하게 울고 있었다
하반신이 무너지고 있었다
서서히 뒷무릎이 꺾이고
잠시 후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핏빛 노을이 걸리고, 적막한
들판이 하나 엎드려 있었다
저물녘이었다. 말이 한 마리
쓰러지고 있었다. 뒷무릎이 꺾이고
서서히
앞다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이재무, 측근, 이라는 말
측근이라는 말 참 정겨워
측근, 측근, 하다 보면 무슨 큰 백이나
지닌 듯 턱없이 배짱 두둑해지고
까닭 없이 측은지심 생겨나기도 한다
내 측근에는 누가, 누가 있나
나는 누구, 누구의 측근인가
사는 동안 측근만큼 든든한 게 어디 있으랴
그러나 다정(多情)도 병이 되는 양
측근이 화 부르고 독 낳기도 하니
사람아, 사람아
꽃과 나비 나무와 새 비와 바람과 눈
그리고 하늘과 구름과 음악과 시(詩)를
평생의 측근으로 두어 살면 어떻겠는가
기혁, 인상파
세상의 빛을 모두 섞으면
환해진다
빨강은 파랑에게 파랑은 초록에게
서로를 양보하고
원점으로 되돌아가기 때문
무수한 빛깔들
이를테면 아이를 잃은 여인의 눈물은
보랏빛을 더욱 연하게 만들고
배신당한 악공의 기타는
초록을 연둣빛으로 바꿔놓는다
보이는 것보다
들려온 빛깔들이 점점 많아지면
자신에게서 가장 먼 것들의 이름부터
차례로
속을 내비칠 수 있었을 텐데
맹인의 검은 동자가
미래를 예언하던 시절에도
우리의 구원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선 매번
어두운 주변이 필요하고
손전등을 비추다 맞닥뜨린 진실은
노상강도를 닮아가는 법
모든 것을 빼앗긴 끝에
목숨만을 부지하는 순간까지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만
희미해진다
주황이 남색을 양보하듯이
남색이 노랑을 양보하듯이
색약의 윤리는 모조리
캔버스 위 사인 속에 감춰 두고서
박라연, 들키다
철새 도래지에서
살얼음 걷듯 걸어갔는데
그저 눈빛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인데
거처를
밥을 버리고 사라져버린다
행복한 공양 시간을
폭격한 저격수가 된 것이다
천지가 빽빽한 이별이 진공이 되어
온몸을 휘감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백성처럼 많은 새들 중(中) 한 마리에게
꽁꽁 언 인연 하나 모이처럼 던져주면
새의 따뜻한 입속에서 녹아내리기를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 아픈 인연 하나 모이처럼 던져주면
그 인연 품고 날아오르기를
주문처럼 외고 또 외는데
평생을 떠돌다
생(生)을 마감하는 철새들에게
인연은 너무 큰 부채라는 듯
난감한 듯
날아가 오지 않는다
전동균, 서리가 내렸다
때 이른 한파 몰아쳐
마가목 나무 밑에 찍힌 새 발자국
하얗게 얼어붙은 아침
살과 뼈를 태우고
핏속의 암종도 태우고
반 평 흙집에 홀로 계신 아버지
얼마나 추우시랴, 그곳은
진로소주도 없을테니
황태국에 밥 말아 먹다가
무언가에 떠밀리듯 숟가락 떨어뜨리고
아버지 계신 쪽으로
슬쩍, 더운 국밥 그릇을
옮겨놓는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