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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벽과 문
이 세상에 옛 벽은 없지요
열리면 문이고 닫히면 벽이 되는
오늘이 있을 뿐이지요
새로울 것도 없는 이 사실이
사실은 문제지요
닫아걸고 살기는 열어놓고 살기보다
한결 더 강력한 벽이기 때문이지요
벽만이 벽이 아니라
때론 결벽도 벽이 되고
절벽 또한 벽이지요
절망이 철벽 같을 때
새벽조차 새 벽이 될 때도 없지 않지요
세상에 벽이 많다고 다
낭비벽이 되는 건 아닐 테지요
벽에다 등을 대고 물끄러미 구름을 보다보면
벽처럼 든든한 빽도 없고
허공처럼 큰 문은 없을 듯하지요
이 세상 최고의 일은 벽에다 문을 내는 것
자, 그럼 열쇠 들어갑니다
벽엔들 문을 못 열까
문엔들 벽이 없을까
진란, 오류
쩡쩡한 하늘에 이름을 쓴 거
벌거벗은 나무에 소망을 옮긴 거
뒹구는 나뭇잎에 사랑을 가진 거
쓸쓸한 가지에 머리를 기대었던 거
그리고 잠들지 않는 시간 속에
샘물 하나 키운 거
그리고, 그리고 그 속에 오롯이 눈뜬 거
박시하, 사랑을 지키다
수박을 들고 커다랗고 짙은 수박을 들고
붉은 물이 가득 든 초록 수박을 들고
삶보다 무거운 수박을 들고 땡볕 아래 걸었네
오래 걸었네 뜨거운 길을 걸었네
짙고 푸른 껍질을 쪼개면 시원할까
그 붉은 물은 달고 시원할까
멀고 먼 수박 껍질 속의 세계를 향해 걸었네
던져버릴 수 없어 떨어뜨릴 수도 없어
둥글고 커다란 수박은 깨져버릴 테니까
짙고 푸르지만 수박의 껍질은 연약하고
내 팔은 가늘고 등은 굽었다
터벅터벅 걸었네
멀고 먼 길 끝이 기억나지 않는 노란 길을
달콤하고 붉고 무거운 그대와
아! 가겠소 난 가겠소 저 언덕 위로
목이 마르지 않았네 눈물이 흘렀네 멀고 먼
지워지고 말 꿈에서
고찬규, 7병동 3분
눈치 없이 눈물은 흘러내린다
티비 위에서 싹을 틔운 감자
묵은 고름처럼 물큰 썩어가며 싹을 기른다
땅에 묻히길 희망하지만 요원하다
이곳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숨 쉬는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고마운 것은 숨 쉬는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눈물겨운 것은 붙어 있는 숨이다
무릎 꿇고 두 손 모은 사내
외투 덮고 새우잠을 자는 아이
링거도 숨죽이고 숨만 숨이다
아침엔 부팅에 3분 걸리던 컴퓨터가 실려 나갔다
배는 늘 고프다 컵라면 익어가는 데 3분 먹는 데 3분
담배 한 개비 타들어가는 데 3분
무슨 생각을 했던가 3분 동안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볼리비아의 한 소년은 오늘도 막장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고
목숨을 건 질주를 한다
주어진 시간 3분
신석종, 시린 독백
밤 새도록
당신 글 읽고
사진 보다가
늦은 아침에
잠에서 깨었어
애들도, 나도
설날이라는데
아무데도 안 갔어
우리 집에도
당신 집에도
밖은, 춥나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