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수목원, 사진 김용국
벽가령 무너지지 않는 벽이 당신과 나 사이에 있다고 합시다.그러면 당신은 나를 보며 밖에 있다고 할 것이고나는 역시 당신을 밖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비가 오면 같은 비를 맞으면서도당신에게 나는 밖, 나에게 당신은 밖일 뿐입니다.당신이 나를 향해서 벽을 밀고내가 당신을 향해서 벽을 밀어도당신에 대해서 나는 밖일 뿐입니다.같은 해와 달 바람 속에서도당신 밖의 나, 내 밖의 당신입니다.벽은 어떻게 놓이든 우리 둘을 밖으로 내몰 뿐입니다.밖에서 우리 모두를 떨게 할 뿐입니다.그래서 벽은 옮기거나 밀어버릴 것이 아닙니다.바지랑대 꼭대기에 않아있던 잠자리가빨랫줄을 넘듯 그렇게 훌쩍 넘어야 할 것입니다.벽 잎에서는 풀무치나 노린재 무당벌레처럼이라도가슴에 날개를 다는 일입니다.가슴에 날개가 돋을 때까지 벽 앞에서는 엉엉우리의 가슴살로 울어야 할 일입니다.
불교에서는 돈오頓悟라는 말이 있습니다. ‘점진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단번에 깨달음’이라는 뜻입니다.
논리적인 설명을 넘어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벽을 무너뜨려야지만 벽의 저쪽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해도 깰 수 없는 벽이, 절망의 벽이 사람과 사람, 국가와 국가,
인종과 인종 사이에는 있지요. 그렇다고 그 벽 앞에서 좌절할 수는 없습니다.
깨지 않고 넘는 방법도 있지요. 날개가 있다면 가능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가슴에 날개를 다는 일’이지요.
이 ‘가슴에 날개가 돋을 때까지 우는 것’을 나는 사랑이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은 모든 벽 같은 조건을 초월하니까요.
죽음조차도 넘어서는 사랑을 우리는 너무 많이 보았으니까요.
잠자리나 풀무치, 노린재, 무당벌레는 벽을 부서뜨리지 않고도
벽 저쪽으로 사뿐 넘어 갑니다. 날개 앞에서는 벽은 이렇게 무력합니다.
이 날개가 바로 사랑이지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
/We can love completely without complete understanding.”는 대사가 기억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