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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gez3KU5OoBI
홍순영, 목련 발자국
꽃들도 발자국을 남긴다는 걸 알았네
어제 내린 밤비에 물컹거리는 진흙바닥 디디며
막 계절을 건너가는 목련의 발자국
서두른 흔적 보이네
꽃잎 이리저리 어지럽게 흩어진 모습
상갓집 신발들 보는 것 같네
급히 우리들을 떠나간 당신도 빗물을 밟고 갔네
나의 일별을 쓸쓸해하며 돌아서는 당신의 발자국
내 발을 밟고 가네
몇 번이고 밟혀 짓이겨진 발등은
언제 이 봄을 다 건너려나
서둘다 보면 넘어지는 봄이네
넘어지면 일어서기 힘든 봄이네
당신처럼, 놓치고야 마는 봄이네
발자국은 점점 선명해지다 홀연히 사라지네
내 기억 속의 당신도 어느 날 문득
저 꽃잎처럼 사라지고 말겠네
심재휘, 찻잎을 두 번 우리다
녹차 잎을 우려내는 동안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였습니다
작은 봄 잎 같고
잎에 떨어지는 빗물 같은 여자
둥굴게 말려있던 그녀가 꼭 쥔
주먹을 펴 나에게 내밀자
내 손은 어느새 늙었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저녁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가을 해는 금방 남루해졌습니다
차 한 모금 마시는 사이에도
순식간에 저무는 것들
나는 따뜻한 물로 식어버린 찻잎을
한 번 더 우립니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찻잎들이 잠시 일었다가 가라앉는 사이
내 사랑은 한없이 엷어졌습니다 어느덧
물 같은 당신에게 갇혀버렸습니다
황영숙, 버리고 왔다
경부고속도로 시속 140km를 달리는데
눈발이 세다
내 가슴을 향해 달려오는
무수한 눈발들
윈도 브러시가 사정없이 밀어낸다
어쩌란 말이냐
어쩌란 말이냐
나는 이렇게 빨리 달려가야 할 길이 있는데
마지막 최후의 몸짓인 듯
막무가내로 내 앞을 가로막던
울부짖던 사랑을
달려도 달려도 껴안지 못하고
버리고 왔다
박창기, 고백
땡볕 아래
긴 빨랫줄 하나
그 허공에
오랜 속옷을 내다 너는 일
곰팡이 다 잡아내는 일
장상관, 저물녘 강가에 서서
누이야
산마루 불잉걸 지펴 삶는가
모롱이 돌아 우는 기적
잔잔한 눈물샘에 또 파문 그린다
고치 뜬 무쇠솥 모락모락 실타래 풀어
피륙 짜는 강가에 서서
나, 흘러가는 고요 만진다
한낱 무명 한 필 짜지 못하여
갈망 절망 뒤척거린다
바람이 데려가는 꽃잎 보며
알 듯 모를 듯 흔들리는 갈대
내가 그러하여
마른 강풀의 한숨 빚어
일렁이는 비단 물결이고 싶어
넋 놓고 본다
다 보고 다 들으며 직조하는 물결
말없이, 고운 홍포 말없이
어두우면 어떠리 묵묵히 짜는
저물녘 베틀소리에 젖는다
누이야
명주필 곳곳에 남긴 네 발자국
굴착기가 깡그리 파내도
가슴에 찍힌 발자국은 어쩌지 못할 거야
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