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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규, 홍시
햇살도 터져 내린 늦가을 저녁
찬 서리마저 핥아 빨아먹고
그렁저렁 한 주먹 살이 된
아, 늙은 아버지
아스라이 감나무에 매달려 있다
박목월, 무제(無題)
앉는 자리가 나의 자리다
자갈밭이건 모래톱이건
저 바위에는
갈매가 앉는다. 혹은
날고 끼룩거리고
어제는
밀려드는 파도를 바라보며
사람을 그리워하고
오늘은
돌아가는 것을 생각한다
바다에 뜬 구름을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것은
앉는 자리가 그의 자리다
벼랑 틈서리에서
풀씨가 움트고
낭떠러지에서도
나무가 뿌리를 편다
세상의 모든 자리는
떠버리면 흔적 없다
풀꽃도 자취없이 사라지고
저쪽에서는
파도가 바위를 덮쳐
갈매기는 하늘에 끼룩거리고
이편에서는
털고 일어서는 나의 흔적을
바람이 쓰담아 지워버린다
한창옥, 사랑니
물컹, 뽑힌 자리 뜨끈하다
그는
내 심장을 꾹꾹 진단하더니
이제는 필요 없는 사랑니라고
난산 끝에 날갯죽지까지 뽑았다
푸른 수건에 덮혀
한 번 튕기지도 못하고 숨죽인 채
사랑의 뿌리는 그렇게 뽑혔다
내 안에서 은밀히 자리를 지켜 준 힘 하나
그 자리에서 쏟아지는 양수 같은 피를
뱉지 말고 삼키라고 했다
그래야 상처가 아문다고
피의 뜨거움이 이렇게 느껴오는데
필요 없다니
뽑힌 자리 아물지 않고 욱신거리는데
필요 없다니
아직도 물컹거리는 사랑을
이재무, 저녁 6시
저녁이 오면 도시는 냄새의 감옥이 된다
인사동이나 청진동, 충무로, 신림동
청량리, 영등포 역전이나 신촌 뒷골목
저녁의 통로를 걸어가보라
떼지어 몰려오고 떼지어 몰려가는
냄새의 폭주족
그들의 성정 역시 몹시 사나워서
날선 입과 손톱으로
행인의 얼굴 할퀴고 공복을 차고
목덜미 물었다 뱉는다
냄새는 홀로 있을 때 은근하여
향기도 맛도 그윽해지는 것을
냄새가 냄새를 만나 집단으로 몰려다니다 보면
때로 치명적인 독
저녁 6시, 나는 마비된 감각으로
냄새의 숲 사이 비틀비틀 걸어간다
나태주, 너도 그러냐
나는 너 때문에 산다
밥을 먹어도
얼른 밥 먹고 너를 만나러 가야지
그러고
잠을 자도
얼른 날이 새어 너를 만나러 가야지
그런다
네가 곁에 있을 때는 왜
이리 시간이 빨리 가나 안타깝고
네가 없을 때는 왜
이리 시간이 더딘가 다시 안타깝다
멀리 길을 떠나도 너를 생각하며 떠나고
돌아올 때도 너를 생각하며 돌아온다
오늘도 나의 하루해는 너 때문에 떴다가
너 때문에 지는 해이다
너도 나처럼 그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