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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 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많은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말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이홍섭, 소래 포구
소래 포구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소래, 하고 부르면 소래가 올 것 같아요
여래를 본 적이 없지만
여래, 하고 부르면
이 덧없는 사바를 건널 수 있을 것처럼요
아주 작은 포구라지요
내 작은 입술을 댈 만은 한가요
그곳으로 가는 철길도 남아 있다지요
가슴을 대면 저 멀리서 당신의 바다가 일렁인다지요
소래, 하고 부르면 당신은 정말 오시나요
여래, 하고 부르면
파도치는 난바다를 잠재울 수 있는 것처럼
소래, 하고 부르면
빈 배 저어저어 당신의 포구에 닿을 수 있나요
김영서, 그림자 없는 나무
큰바람이 지나간 뒤 그림자가 사라졌다
집 앞에 두고 힘들 때마다
잠시 쉬었던 그늘이 사라졌다
가까이 보니 나무가 그늘을 베고 누워 계시다
힘겨웠던 게다
그늘에 들 때마다
나의 푸념을 거두어 갔던 나무가
그늘을 베고 상념에 젖어 계시다
발가락이 이불 밖으로 보인다
아직 촉촉한 발가락을 바람이 말려주고 있다
나뭇잎이 시들기 시작한다
생각이 깊어지나 보다
정영주, 흔적
집에 오니
옷자락에 쐐기풀이 잔뜩 박혀 있다
숲 속 몇 마장 들다 나왔는데
산자락이 타넘고 간 듯
여기저기 내가 구겨져 있다
적막을 못 견딘 쐐기풀이나
슬픔을 못 견딘 내 아픔이
서로의 몸을 알아챘는지 모른다
서로의 상처를 슬쩍 바꾸었는지도
쐐기풀을 하나하나 뜯어내다
내 안의 가시도 찾아낸다
어느 날 무심히 몸에 달고 온
가시풀들이 불러낸 생의 문양들
지나가고 나면 깊이 찔린 것일수록
그 흔적에 더 손이 간다
김행숙, 땅거미 지다
어둑발 산이 점점 뚜렷해지더니
내 앞을 병풍처럼 막는다
바람은 곁으로 다가와 감싸듯
오늘 하루 괜찮았느냐고 속삭이고
내 안에 들어와 크는 나무들
하늘이 오늘의 마지막 빛으로 물들어갈 때
산등성이 위로 날아가는 까치들의 행렬은 길고
괴롭고 적막한 하루도 끝나
땅으로 내려오는 거대한 거미에 사로잡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