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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정, 어머니의 꽃밭
어머니의 꽃밭에 두고 온 게 있지요
어스레한 저녁으로
열리던 분꽃
씨앗에 담긴 뽀얀 분가루
어머니가 가꾸어 온 오랜 꽃밭
다시 피워야할 꽃들이
세월의 두께를 벗고
부드럽게 흙을 달래며
생각 한 잎을 밀어 올리는 거지요
기억 속의 멧새들이
지절거리다 노곤히 잠에 겨운 밤
어머니가 간절할 때마다
분꽃이 열리고
마음이 베인 자리, 가만히
새 살이 돋아나는 거지요
길상호, 어미를 먹은 기억
고구마에 싹이 돋았다
물 한 방울 없는 자루 속
썩은 내 풍기는 저 무덤 속에서
새파랗게 싹은
잘도 자랐다
탯줄을 자르기 전
어미를 먹고 자라던 기억이
나에게도 있다
황영숙, 저녁 비
낮게 흔들리던 구름이
내려앉으며
어둠보다 먼저 비가 내린다
오랜 우물 속에 잠겨 있던
풍경들이
빗속에 젖어 가고
베란다의 꽃들은 먼 야생의
숲속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키 작은 나무들이
팔을 벌리고 있는
비가 내리는 저녁
햇살을 데리고
떠난 새들은
지금쯤 어디를 날고 있을까
닫힌 방안에서
오래오래 잊었던
슬픔 하나
다시 비에 젖는다
이홍섭, 터미널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시곤 했다
강원도 하고도 벽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번뿐인데
아버지는 늘 버스가 시동을 걸 때쯤 나타나시곤 했다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대병원으로 검진받으러 가는 길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놓고는
어디 가시지 말라고, 꼭 이 자리에서 서 계시라고 당부한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벌써 버스에 오르셨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 꼭 서 계신다
어느새 이 짐승 같은 터미널에서
아버지가 가장 어리셨다
김행숙, 눈부신 보색
고추모가 땅에 단단히 서기까지
얼마나 흙과 씨름하는지 나는 안다
힘없는 뿌리가 땅 속에 자리 잡으면
세상에서 가장 선한 표정의 꽃이 핀다
여름내 땡볕에 달구기를 넉 달
주렁주렁 고추가 열릴 때까지
받침대 서로 묶어 비바람 이겨내고
빨강과 초록이 어깨 겯고 있다가
고추잠자리 두어 마리 날아와 앉는다
반질반질 윤나는 녹색 꼭지에 빨강 고추
지상에서 가장 눈부신 보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