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미, 때로는
아주 오래된 지도
지구가 둥글다는 걸 몰랐던 시절의 지도
때로는 그런 지도 위에서 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지구가 끝나는 곳이 두 눈에 보이고
그곳으로 곧장 걷고 또 걸어가기만 하면
그 끝에 가 닿을 수 있는
그래서 다시는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는
뛰어내리기만 하면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하염없이 떨어지다
결국
무(無)가 되는
무한이 되는
때로는 그런 지도 위에서 살고 싶어질 때가 있다
너무나도 간절하게
윤제림, 매미
내가 죽었다는데, 매미가 제일 오래 울었다
귀신도 못되고, 그냥 허깨비로
구름장에 걸터앉아
내려다보니
매미만 쉬지 않고 울었다
대체 누굴까
내가 죽었다는데 매미 홀로 울었다
저도 따라 죽는다고 울었다
김인숙, 날은 도처에 숨어 있다
짧은 반바지 아래 하얀 종아리를
풀잎이 베어버렸다
선연한 한 줄기 핏자국
프린터기에 종이를 채우는데
손가락이 따갑다
종이에도 날이 있었구나
그와 얘기를 하다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가슴을 찌르는 칼날 같은 말 한 마디
말의 날카로운 날이 뼛속까지 파고든다
믿었기에 상처는 더욱 깊다
날은 도처에 숨어있다
시퍼런 눈 번뜩이며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다
최정란, 마릴린 먼로
지붕 위에
마릴린 먼로가 앉아 있다
박꽃 진 자리
새봉분처럼 둥근 엉덩이
하얗게 까붙였다
구멍 뚫린 어둠에
바짝 붙어 앉아
눈을 반짝이는 별들
찰칵, 몰래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샤넬 No, 5
향기가 찍혀나온다
아찔한 외출이다
함성호, 절정
돌보지 않아도 피어나는구나
봄비 내리는 오후
절음발이 비둘기들의 초췌
물오른 어린잎들의
칼날 같은 끝
도저히 피할 수 없다
아름다움은 어디로 가는가
무화과의 달콤함
젖은 꽃잎의 부드러움
다시 보러갔던 그 산수유나무
글쎄
또 한 시절이 가는구나
무슨 소용인가
몸은 습관만 알아보고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은 한곳에만 있네
젖을수록 더 붉고, 더 부드러운 꽃
너의 은밀함
덮쳐오는 물그림자처럼
치명적으로 하강한다
도저히 피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