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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이에요
게시물ID : panic_8677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아이고정팔아
추천 : 10
조회수 : 1681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6/03/15 00:5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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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도 어김없이 아버지한테 맞고 있었어요.
평소 같았으면 조금이라도 덜 맞으려고 조용히 있었을 텐데, 왜 그랬는지 반항을 했어요.
덕분에 전 한겨울에 신발도 못 신은 채 집에서 쫓겨나야 했죠.
 
한참을 걷다 눈에 보이는 벤치에 앉았어요. 아니, 앉아있었나 봐요. 어떤 남자가 말을 걸어 정신이 들었어요.
죄송하지만 너무 걱정되어서 말을 걸었다는 말에 그제야 제 몰골이 어떤지 깨달았죠.
추워 보인다며 자기 외투를 벗어서 제게 덮어주는데 얼마나 따뜻했는지 벌겋게 얼어있던 제 발이 녹는 기분이 들었다니깐요.
 
그는 절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어요.
그는 내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지 않았어요. 단지 핫초코 한 잔을 주곤 방에서 나가 있었죠.
몸이 좀 녹은 후 나오기 전에 책상 위에 사례하겠다고 제 핸드폰 번호를 적어 놓고 나왔어요.
 
그렇게 우린 연락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사례 같은 건 필요 없다며 끝낼 생각이었겠지만 제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죠.
전 그에게 제 이야기를 글로 써달라고 했어요. 글 쓰는 게 취미랬거든요.
그가 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후부터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마침내 사귀게 됐어요.
아마 저에 대한 그의 감정은 연민이었을 거예요. 제 얘기를 듣는 사람은 누구나 가지는 감정이니까요.
 
집에서의 폭력은 점점 심해졌어요. 몸에 상처가 나는 횟수가 많아졌죠.
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항상 긴 팔 긴 바지만 입었고 얼굴엔 화장을 진하게 했어요.
어느 날 그가 저에게 말했어요. 사랑하는 여자의 얼굴에 멍이 들어있는 모습이 더는 보기 힘들다고.
자기랑 살면 더는 맞는 일이 없을 거래요. 그 말이 프러포즈인 줄은 한참 후에 알았죠.
 
그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어요. 어머님은 얘기를 들었다며 제 손을 꼬옥 잡아주셨어요.
그가 형제가 없는데 딸이 생겼다며 엄마라고 부르라고 하셨어요. 아버님도 정말 좋은 분이셨어요.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잘 다가가지 못했던 게 아직도 후회돼요.
 
결혼한다는 말도 없이 집을 나왔는데 아버지는 절 찾지도 않더라고요.
저흰 혼인신고만 하고 살기로 했어요. 부모 없는 결혼식이 싫었거든요.

그래도 신혼 생활은 행복했어요, 처음 몇 달간은요.
그 후에는 세상에 화가 났어요. 남들한테는 이게 당연한 거라는데 저는 왜 그러고 살아야 했을까요?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남편이 밉더군요.
그는 항상 나를 다 이해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이해하는 ‘척’이지 않았을까요?
겪어본 적도 없는 일을 이해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네, 그는 참 좋은 사람이죠. 하지만 그가 우리 집에서 태어났어도 좋은 사람이었을까요?
그에게 있는 ‘좋은 부모님’ 덕분에 그가 좋은 사람이 된 게 아닐까요?
 
생각해 보세요, 계산은 정말 간단해요. 어머님이 57세 시니까 돌아가시기까지 30년 정도 남았다 치면,
남편은 30년 동안 좋은 부모님 밑에서 행복하게 자랐으니 저도 남은 30년 동안 좋은 부모님과 행복하게 살면 공평하잖아요?
 
그 날 저녁에 남편을 불러 얘기했어요. 나도 좋은 부모님을 갖고 싶다고.
그는 웃으며 우리 엄마 아빠는 정말 널 딸처럼 생각하셔 라고 말했고요.
아니, 그건 너희 부모님이잖아. 난 내 부모님을 갖고 싶어, 미안해 라고 말 한 뒤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그를 여러 번 찔렀어요.
그리고 그가 아파하는 동안 옆에 있던 넥타이로 목을 졸랐어요. 생각보다 쉽게 죽어주더라고요.
 
형사님, 제가 좋은 부모님이 있었더라면 남편을 죽일 이유도 없었겠죠. 남편이 죽은 건 다 제 아버지 때문이라고요.
제 잘못이라면 ‘나쁜 부모님’ 밑에서 자란 것과 행복해지고 싶었던 것 밖에 없어요.
그러니 제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살인죄를 적용해야 한다고요.
 
아 참, 남편이 말해줬는데 제가 벤치에 앉아있던 날이 크리스마스였대요.
평소였으면 그냥 지나갔을 텐데 크리스마스라 말을 걸게 돼서 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던데,
남편도 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거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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