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근, 갈림길
길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
너에게로 가는 길이 나에게 있었고
나에게로 가는 길이 너에게 있었다
지금 가장 멀고 험한 길을 걸어
너는 너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나는 나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이제 작별하자
이승에서의 길은 여기까지다
길이란 가까워질수록 멀어지는 것이니
멀어질수록 가까워지는 것이니
구순희, 밥이 질다
오늘 비 왔지
밥이 질다 말하지 않고
비와서 넉넉히 물 부었다고
야단 한번 안치고 웃음으로
소리 없이 꾸짖는 뼛속의 말씀으로
울컥, 화내고 싶을 때도
찬찬하신 그 말씀
왜 단번에 해내지 못하고
그 길이 더딘지 묻지도 못하고
비오지 않아도 물먹는 마음
온몸이 젖어 밥이 질다
나희덕, 풀의 신경계
풀은 돋아난다
일구지 않은 흙이라면 어디든지
흙 위에 돋은 혓바늘처럼
흙의 피를 빨아들이는 솜뭉치처럼
날카롭게 때로는 부드럽게
흙과 물기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풀의 신경계가 뻗어간다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풀은 풀과 흔들리고 풀은 풀을 넘어 달리고 매달리고
풀은 물결기계처럼 돌아가기 시작한다
더 이상 흔들릴 수 없을 때까지
풀의 신경섬유는 자주 뒤엉키지만
서로를 삼키지는 않는다
다른 몸도 자기 몸이었다는 듯 휘거나 휘감아들인다
가느다란 혀끝으로 다른 혀를 찾고 있다
풀 속에서는 풀을 볼 수 없고
다만 만질 수 있을 뿐
제 몸을 뜯어 달아나고 싶지만
뿌리박힌 대지를 끝내 벗어나지 못해
소용돌이치는 풀
그 소용돌이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싶고
나는 자꾸 말을 더듬고
매순간 다르게 발음되는 의성어들이 끓어오르고
풀은 너무 멀리 간다
더 이상 서로를 만질 수 없을 때까지
양진건, 풍경
뼈가 많고 살이 적은 말들이 서쪽을 달리고
그 개골(皆骨)의 풍광에 부는 바람이여
한참을 보아도 참 찬란하다
이선영, 나목
붙들고 싶다, 흔들거리는
막 떨어져 내리려는 잎사귀 한 장
바람 불면 간지럽게, 두근거리게, 흔들릴
단 몇 장 잎사귀라도 남겨 놓을 수 있다면
등(燈)을 켜듯 내게
표정을 달아다오
살랑 바람 닿으면 웃음 짓고
모래 바람 지나면 미간을 찌푸리고
비바람 몰아치면 두려움에 하얗게 질리는
풀칠로라도 붙이고 철사로라도 엮어 다오
말랑말랑하던 내 잎사귀를
움직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이 딱딱한 화염(火焰)을 눈치 채 줄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