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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엽, 벽의 바깥
한 중년 사내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마을 앞 산책로에서 오줌을 누고 있었다
남의 시선은 아랑곳 않은 채
그 길섶에서 방뇨를 즐기고 있을 때
주인의 퉁퉁한 엉덩이를
덩치 큰 세퍼드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개가 없을 때는
그저 스쳐갈 일상의 장면이었지만
개로 인하여 인간의 조건이 씁쓸해진
그 순간에 사르트르가 생각났다
왜, 오줌에 젖은 사내에 겹쳐져
내 감춰진 본능도 거울에 비친 듯 드러날 때
자꾸만 구토증이 나는 것일까
사람은 깊고 높은 것
그러나 포장을 찢고 벽의 바깥으로 나오면
저렇게 실존하는 한 인간을 만난다
지금, 그리고 여기서
온몸을 꿈틀대는 나를 만난다
구석본, 낙화
꽃이 떨어진다
꽃이 파닥거리며 지워진다
꽃이 지워지며 그려내는 투명한 허공
그 속에서는
3월의 설렘과 기다림이
한때의 쓸쓸함과 눈물도 바람일 뿐이다
허공이 근육을 모아 뱉어내는 바람
순간
무르익은 허무가
와르르 쏟아지고 있다
지상의 봄은
한 시절 내내
허무를 피워 올렸던 것이다
이재훈, 잿빛이 나를 위로하네
늦은 여름 바닷가에 갔었네
텅 빈 모래밭
빗줄기 몇 가닥 바다에 금을 긋고
햇볕은 숨어드네
모든 소리가 잿빛에 파묻히는
해거름 바다
잿빛이 풍경을 비우게 하고
나는 숨죽여 울어보네
통곡은 이제 지루한 것
혀의 불행을 따르지 말아야 하는데
거센 파도 소리에 좀먹는 물의 통곡
잿빛이 내 등을 두드려 주네
바다도 잿빛
하늘도 잿빛
구름도 잿빛
유리병 안에 갇힌 내 자존심
누군가 구경하고 지켜보는 처절한 내 몸
비웃음이 도처에 널려 있네
쉬쉬쉬쉬 파도는 숨죽이네
낮의 비애에 젖지 않으며
검은 바다 깊숙이 잠겨 묵언할 것
그것으로 내가 세상에 제출한 주문은 살아 있는 것
터널 안 얼룩진 불빛처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랑을 하고 싶네
잿빛의 풍경 속에 홀로 어슬렁이는
해거름 바람이 되고 싶네
당신께 이 고요를 드리고 싶네
정윤천, 해를 바라본 자를 위하여
해는 바라보는 게 아니리
춥거나 따가움만큼으로
느끼는 것이리
만약에, 너를 바라본다는 일
하나만으로
눈이 멀기로 작심한 이가 있다면
그는 해를 향하여 직진으로 걸어간
붉은 가슴의 사람이었으리
너로 인하여 절명(絶明)을 기도한
붉은 얼굴의 가슴이었으리
염창권, 부유(浮游)
바다가 제 스스로 깊어지면서
지난여름의 부유와 갈망을
잠재우는 동안
겨울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걸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이 쓸쓸하다
부유를 견디면서
내면을 향해 물길을 돌리면
외로움조차 맑게 빚어질까
도요새가 밀물을 따라 걸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