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7knARRRtSWs
이수명, 풀
풀이 허공을 떠다닌다
풀이 목을 휘감는다
검은 물이 쏟아져 내리는
목이 닫힌다
원근법이 사라진다
풀이 허공에 금을 낸다
내 얼굴에 금들이 떠다닌다
금이 나를 덮는다
풀은 아무것도 들어 올리지 않으며
풀은 생각에 부딪치지 않는다
풀은 나를 베어내지만
내 생각을 쓰러뜨리지 않는다
최금진, 장미의 내부
벌레 먹은 꽃잎 몇 장만 남은
절름발이 사내는
충혈된 눈 속에서
쪼그리고 우는 여자를 꺼내놓는다
겹겹의 마음을 허벅지처럼 드러내놓고
여자는 가늘게 흔들린다
노을은 덜컹거리고
방 안까지 적조가 번진다
같이 살자
살다 힘들면 그때 도망가라
남자의 텅 빈 눈 속에서
뚝뚝, 꽃잎이 떨어져 내린다
이영광, 문(門)
가지 말아야 했던 곳
범접해서는 안되었던 숱한 내부를
사람의 집 사랑의 집 세월의 집
더럽혀진 발길이 함부로 밟고 들어가
지나보면 다 바깥이었다
날 허락하지 않은 어떤 내부가 있다는 사실
그러므로 한번도 받아들여진 적 없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나는 지금
무엇보다도, 그대의 텅 빈 바깥에 있다
가을바람 은행잎의 비 맞으며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곳에 닿아서야
그곳에 단정히 여민 문이 있었음을 안다
권애숙, 자갈치의 달
땅바닥에 가장 낮게 내려앉아
철퍼덕, 엉덩이를 뭉개고 앉은 달
손 내밀면 가슴까지 무너져
질척한 난전에서 사람 소리를 한다
자갈치아지매 비릿한 전대 속에서
부새비늘과 함께 뒹굴던 백동전처럼
막소주 꼼장어구이에 얼큰해진 바다사내
깊은 울음 속에서 퍼올린 순정처럼
두리둥실
사람을 닮은 바다와 바다를 닮은 사람들 다 끌어안고
포장마차 속에서 지글지글 굽히고 있는
간이 잘 된 자갈치의 달
봐라, 한 잔 칵 부뿌라
이리 권하고 저리 권하는 술잔 따라
쓸쓸한 내가 발라먹고 거나한 바다가 발라먹어도
비틀거리는 자갈치 발 밑에 다시 떨어져
하,하,하, 환하게 굴러가고 있다
이재무, 보리
보리밭 속에 들어가
보리와 함께 서 본 사람은
알리라 바람의 속도와
비의 깊이를
보리밭 속에 들어가
보리와 함께 흔들리며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정확히 알리라
세상 옳게 이기는 길
그것은 바로
바르게 서서 푸르게 생을 사는
자세에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