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옥, 용서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용서하는 것이란다
수시로 가마득히 지난 일이
불쑥 부아를 지르며 올라오면
핏줄이 곤두서고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세월 따라 잊혀짐도 하다마는
가슴을 후비며 일어설 때는
제어되지 않는다
그래도 용서해야 한다며
'용서 못하는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는
보속을 받고도
용서는 기도 속에 없다
권덕하, 생강 발가락
저건 뿌리다
무른 진흙 딛고 참은 울음이다
너덜겅 걷다가
매운 다리품이 감췄다가
비어져 나온 생각
식구들 잘 보듬고 가만히 나가
어둑발 훔치며 좌판 펼치는
아내의 걸음새에
땅을 미는 힘으로 솟은 햇귀가
속 깊이 쟁여 준 가락이다
강은교, 희망
희망이 팔을 쭈욱 내밀고 있어
희망의 눈초리는 낙타처럼 길군
희망의 입술은 꽃살처럼 부드러워
희망의 어깨는 분홍이군
그럼 이제 희망의 손을 붙잡게
그럼 이제 주머니 깊숙이 희망을 넣게
아
달큼쌉쌀한 당신, 희망의 혀
박수현, 해거름
바람이 지친 발끝을 내려
늘어진 나뭇잎을 흔들다 맙니다
강물 속 저어새 부리가 길어집니다
넘기던 책장이 손가락에 달라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햇살이
책상 위, 먼지 알갱이를 건드려보다 갑니다
이해리, 희디흰 적막으로
눈썹까지 눈이 내린 산사에 와서
고드름으로 귀를 닫고
흰 눈으로 입을 봉한
암자와 마주 섰지요
댓돌 위 흰고무신엔 적막을 신겨놓고
갈피마다 눈가루 뿌린 붉은 동백 앞세워
묵언정진 팻말 하나로 나를 맞네요
세상에 와서 가장 많이 쓰고 가는 건
물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말이라 하던
당신 말이 생각났습니다
묵언만큼 깨끗하고 아름다운 말이
세상에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