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 가난의 용도
달동네 좁은 골목 언덕길로
연탄을 날라다 주고
독거노인과 소녀 가장에게 남몰래
쌀과 김치 보내준
가난한 이웃들의 이름
아무도 모른다
빈민 운동가로 막사이사이 상을 타고
빈곤층 대변하던 그 국회의원
누구인가
우리는 알고 있다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고
공표한 명망가도 있었다
중산층이나 부자보다 빈민들의 수효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았던
의회주의자 그는
가난의 용도까지 속속들이 깨달은
뛰어난 정치인이었다
그렇다 누가 뭐라 해도 인간은
무리 지어 떠도는 불쌍한
정치적 동물 아니냐
이수명, 벌레의 그림
벌레 한 마리 뒤집혀져 있다
바닥을 기던 여섯 개의 다리는
낯선 허공을 휘젓고 있다
벌레는 누운 채 이제 닿지 않는
짚어지지도 않는 이 새로운 바닥과 놀고 있다
다리들은 구부렸다 폈다 하며 제각기 다른 그림을 그린다
그는 허공의 포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허공의 만삭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거기에 그림을 그린다
권운지, 압화
오래된 책갈피 펼치다 너를 만난다
한 때 이슬 맺히고 번개가 지나가던 몸
비로소 주술이 풀린 듯 고요하구나
내 마음 갈피에도 자국이 깊다
어느 이름 모를 지상의 우체국에서
세상으로 보내는 마지막 편지 속 눈물방울
더 이상 갈 곳 없던 육체의 마지막 그 곳
그 벼랑 위의 꽃
박숙이, 등 푸른 역설
그물로 고등어를 건져 올리는 한 어부에게
위로 겸 인사 겸 낚싯대처럼 한마디 툭 던졌다
오늘 고등어가 많이 잡혔다면서요, 들어올리기가 무겁진 않으세요?
아니요, 고기가 안 잡혔을 때, 그때가 정말 무거워 힘이 들지요
그 말에 수평선은 틀림없이 밑줄을 선명히 그었을 것이다
유병록, 눈썹
침이 흐른다
눈물이 흘러내린다 고통이 지나갈 때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일그러지는
저기 무성한 숲이 있었다니
욕망의 키를 재어볼 수 있는 나무가 있었다니
그 나무들을 베어
식탁과 책상을 만들었다니
저 숲을 밤새도록 흔들어대던
폭풍의 밤은 지나갔다
숲에서 벌어졌던 몇 가지 연애 사건도
모두 소문이 되었다
구부러진 나무 몇 그루
간신히 대칭의 무늬를 이루고 있는 숲
금이 간 자연의 비유는
복원되지 못한다
날개가 상한 나비처럼 벌레 먹은 나뭇잎처럼
망설임도 죄책감도 없이
곧 무너져 내릴 대칭의 세계
그녀가 웃는다 혹은 운다
죽기 전에
나비가 날개를 활짝 펼쳐 보이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