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MTXHGtBHo2Q
황구하, 환한 구멍
천태산 은행나무 큰 덩치 하나 내려앉았다
간밤 다녀간 비와 바람의 농간이라 하지만
하루하루, 아름다운 낙지(落枝)를 위해
깊은 어둠 끌어안고
스스로 구멍을 내는 데 게으름 피우지 않았다
그 공덕으로 마침내 허공이 열려
또 한 짐 부릴 수 있으니
절 한 채 떠메고 가는 비책, 저 구멍에 있다
김륭, 눈사람을 만드는 건 불법이야
햇빛에 허를 찔려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거려줄지도 몰라
눈사람을 만드는 건
불법이야, 햇빛은 언제나
어둡고 가난한 세상을 부정하고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를
팔다리가 잘린 채 암매장된
시체처럼 발굴하지만
괜찮아, 나는
태어날 때부터 두 손을
가슴에 푹 찔러놓고 다니는
습관이 생겼거든
글쎄, 어디쯤에서 펑펑
울었는지 누군가 질겅질겅
씹다 버린 껌을 밟았는지 그건
꽃밭에 발자국을 숨겨놓고 사는
눈사람의 사생활
오늘도 햇빛은
얼굴이 지워진 내 사랑을
고물 자전거 펑크 난 바퀴처럼
굴리고 가지만, 괜찮아
사과를 쪼개듯 햇빛이
세상을 반으로 나누지는
못할 테고, 나는
눈사람보다 더 따뜻하게
죽을 자신이 있거든
이건 절대 불법이
아니거든
박숙이, 굴렁쇠
이제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아무리 잘 굴러도
구르는 재주가 용타 해도
나 혼자서는 어림도 없는 일
텅 빈 나
혼자서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었던 나
밀어준 손, 끌어준 손, 지켜본 눈
무수히 많네
참으로, 참으로 둥근
굴렁쇠 삶이었네
김인숙, 몸살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
길게, 멀리가고 싶은 몸
가두었다
주전자가 몸살을 앓는지
부글부글 열이 오른다
갇힌 것이 병이 된 모양이다
지독하게 긴
혼자만의 싸움이다
수양버들 가지처럼 늘어지는 오후
오월 산란기의 열목어 한 마리
계곡 아래 깊은 여울로 가라앉는다
충혈된 눈 속의 마그마가
분출하는 신열로 솟구친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인데
제자린 줄도 모르는 제자리에서
일급수에 젖어 웅크린 몸들
뒤틀리는 유리병 속에 있다
박진형, 점에 대하여
비루먹은 조랑말 빼고
우짖던 서리까마귀도 빼고
한쪽으로만 허리 휜 소나무도 빼고
예까지 따라 온 구부정 길도 빼고
아무렇게나 펄럭이던 청춘도 빼고
밤새 으르렁거리던 파도도 빼고
덧니 고운 애인도 빼고
눈물로 동여맨 추억도 빼고
절망한 자살바위도 빼고
노란 제주바다만 남겼다
적막 견딜 수 없어
검은 점 하나 찍어 두었다
그 속에 너를 숨겨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