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무, 가을
반짝이던 소음이 가라앉고
저녁의 들숨날숨 손에 잡힐 듯 환한
창가에 앉아 귀가 큰 소처럼 서서
가을 속으로 걸어가고 있는 한 나무를
오래도록 바라다본다 저 나무는
참으로 바르게 시간의 주인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지난 계절 환희의 알몸으로 시들고 지친
내 오후의 생에 넓고 시원한 그늘 드리웠던
저 나무에게 그러나 나는 한 바가지 물
한 삼태기의 거름 져 나른 적 없다
나무라고 해서 어찌 인욕의 시간이 없었겠는가
바람이 불고 많은 비가 내리고 또
종아리 다녀가는 회초리처럼 가문 날의 폭염이
그의 생의 멱살 움켜쥘 때도
저 나무는 크게 표정 바꾸지 않고
제 생의 영토 고스란히 지켜 오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저 붉은 잎잎은
울림이 큰 느낌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슬픔이 지혜를 가져오듯
깨달음은 몸을 부려야 가까스로 인색하게 찾아오는 것
푸르게 젖어가는 저녁의 창가에 앉아
직립으로 살아가는, 수백 수천의 푸르고 붉은 등
가지마다 내걸어 길 밝히는
내 오랜 정인 물끄러미 바라다 본다
장혜랑, 바람의 입
겨울 산이 헉헉 소리 내어 우는 건
말 많은 바람의 농간이라고
정말 그러는 걸까
할 일 없는 철새들이 날아와 구경한다
바람의 입은 자로 잴 수 없이 커
또 다른 소문으로
민둥산을 푸름푸름 덮기 시작한다
홀로 흐느끼는 겨울 산의 마음자리
내 귀는 그대 발자국 소리 듣지 않고도
언 땅 몸 푸는 청보리같이
푸른 답장을 쓰리
최영미, 이미
이미 젖은 신발은
다시 젖지 않는다
이미 슬픈 사람은
울지 않는다
이미 가진 자들은
아프지 않아
이미 아픈 몸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미 뜨거운 것들
말이 없다
윤임수, 경배
안성 칠현산 참나무 숲길
그 단풍 고운 것 미리 알고
노란 듯 불그레한 웃음 한 자락
풋풋한 벌레께서 떼어가셨다
누가 감히
벌레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하는가
사각사각 길게 숨죽이는
그 은밀한 사랑도 알지 못하면서
염창권, 의자
의자는, 기억을 담아두는 그릇이다
다리를 휘게 하면서
앉았던 바닥이 패여 있다
순간순간 몰려왔던 회오의 감정들이
탄식과 함께 흙바닥을 짓이기면서
작은 흉터를 남긴 것이다
콘서트가 끝나자
인부들이 플라스틱 의자를 쌓아올린다
차곡차곡 포개지면서 의자는
껴안거나 안겨 있는 한 덩이를 이룬다
끌고 온 기억들이 허망하게 무너질 때
의자는 그릇처럼 잠자코 날 포개어 둔다
한 기억이 다른 기억들을 겹겹이 껴입고 있으니
오늘의 기억 속에
이전의 널 빼낼 수가 없다
무릎 관절이 꺾이면서
의자에 머무르는 시간
내 기억이 널 꼭 껴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