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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애, 넝쿨
어머니 가꾸시는 텃밭은 넝쿨 아닌 것이 없다
호박, 수세미, 박, 울양대
행여 허물어진 속살이 보일까
서로 덮어주면서
천둥이라도 치면 번개라도 치면
서로 몸을 비비며
한고비 넘고
쉬이 달래지지 않는 마음이라도 있으면
넝쿨넝쿨 담이라도 넘어가
맺히는 것 없이
걸리는 것도 없이
술술 풀어내는 인생
어머니 가꾸시는 텃밭에는
풀어보면 한 알 한 알 목이 메이지 않는 것이 없다
장혜랑, 바위
그 뒤 사람이 따라 배웠겠지만
묵비권은 바위가 제일 먼저 시작했을 것이다
말해 보라, 내리 다그치는 비바람 앞에
늙은 산그늘과 살고 싶어
일찍 말문 닫아 건
내가 원한 벙어리일 뿐이라는
그는 이 말조차 끝내 하지 않았다
김소연, 마흔 살
먼 훗날
내 손길을 기억하는 이 있다면
너무 늙지 않은 어떤 때
떨리는 목소리로 들려줄
시 한 수 미리 적으며
좀 울어볼까 한다
햇살의 손길에 몸 맡기고
한결 뽀얘진 사과꽃 아래서
실컷 좀 울어볼까 한다
사랑한다는 단어가 묵음으로 발음되도록
언어의 율법을 고쳐놓고 싶어 청춘을 다 썼던
지난 노래를 들춰보며
좀 울어볼까 한다
도화선으로 박음질한 남색 치맛단이
불붙으며 큰절하는 해질녘
창문 앞에 앉아
녹슨 문고리가 부서진 채 손에 잡히는
낯선 방
너무 늙어
몸 가누기 고달픈 어떤 대에
사랑을 안다 하고
허공에 새겨넣은 후
남은 눈물은 그때에 보내볼까 한다
햇살의 손길에 몸 맡기고
한결 뽀얘진 사과꽃 세상을
베고 누워서
이성목, 낙엽
엎어진 밥상이라 하자
콧물 범벅이 된 아이들의 따귀라 하자
죽자 죽어버리자 엄마가 울고
아이들은 무서워, 엄마 무서워 울고
내 못나서 그렇다 아버지도 울고
까뭇까뭇 꺼져가는 백열등이
술에 취한 짧은 혀가
짝이 없는 신발 한 짝이
밤새도록 뛰어내린
그 아래
가지 아래
난간 아래
발목 없는 발자국이라 하자
자루 없는 칼이라 하자
김경호, 풀잎 연가
군데군데 떨어져 피어나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다져 먹고
어지러운 하늘 속
가라앉지 못하는 먼지바람 하나도
버리지 마
밀리고 흩어진 벌판 위에
잠들지 않고 내리면서
굽은 등 펴고 눕게 하는 비
비 맞아도 젖지는 마
굽히고 잠들게 하는 어둠도
그리운 그대 이름도
이젠 따뜻한 아픔인 것을
군데군데 떨어져 피어나
떨어져 있어도 결코 쓸쓸하게
지워지지는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