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빵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잘 구워진 빵
적당한 불길을 받아
앞뒤로 골고루 익혀진 빵
그것이 어린 밀이었을 때부터
태양의 열기에 머리가 단단해지고
덜 여문 감정은
바람이 불어와 뒤채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제분기가 그것의
아집을 낱낱이 깨뜨려 놓았다
나는 너무 한쪽에만 치우쳐 살았다
저 자신만 생각하느라고
제대로 익을 겨를이 없었다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속까지
잘 구워진 빵
정호승, 밥 먹는 법
밥상 앞에
무릎을 꿇지 말 것
눈물로 만든 밥보다
모래로 만든 밥을 먼저 먹을 것
무엇보다도
전시된 밥은 먹지 말 것
먹더라도 혼자 먹을 것
아니면 차라리 굶을 것
굶어서 가벼워질 것
때때로
바람부는 날이면
풀잎을 햇살에 비벼 먹을 것
그래도 배가 고프면
입을 없앨 것
복효근, 홍시
누구의 시냐
그 문장 붉다
봄 햇살이 씌워준 왕관
다 팽개치고
천둥과 칠흙 어둠에 맞서
들이대던 종주먹
그 떫은 피
제가 삼킨 눈물로 발효시켜
속살까지 환하다
함민복, 달과 설중매
당신 그리는 마음 그림자
아무 곳에나 내릴 수 없어
눈 위에 피었습니다
꽃피라고
마음 흔들어 주었으니
당신인가요
흔들리는
마음마져 보여주었으니
사랑인가요
보세요
제 향기도 당신 닮아
둥그렇게 휘었습니다
맹문재, 한 그루의 나무를 위하여
나의 시가
한 그루의 나무만큼만 살았으면 좋겠네
플라스틱 스티로폼 시멘트말고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처럼 창창하게
살았으면 좋겠네
나의 시가 발표되기 위해서는
수십은 살았을 한 그루의 나무가
베어질 것이네
그 나무만큼 나의 시가
사람들의 가슴에 들어찼으면 좋겠네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은 이끌어주는 안경이 되고
신발이 되고
부억칼이 되었으면 좋겠네
나의 시가
한 그루의 나무만큼만 살았으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