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호, 커브처럼
그냥 변화구를 던져 줘, 라는 말보다
내게 커브를, 이란 말이
훨씬 매력적이란 걸
곧장 당신에게 달려왔어요, 라고
바로 들이대는 것보다는
어딜 좀 들러 오느라...하는
머뭇거리는 얼굴이
내 맘 더 깊이 파고든다는 걸
커브, 하고 말할 때면
어딘가 살짝 비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자꾸 빙빙 도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지쳐
잠시 쪼그리고 앉아 쉬는
네 흔들리는 숨결들
커, 커브라고
내게 커브를 던져 줘, 라고 말할 때
네 혀끝에 걸려 있던 바람이
어느 순간 나를 향해 밀려오듯
그렇게 내게로 와 줘
어디로 꺾일지 모르는
마음의 둥근 궤적을 따라
커브로, 커브처럼, 그렇게
이영광, 녹색
녹색은 핏방울처럼 돋아난다
온 세상이 상처이다
먼 들판에 시내에 눈 녹는 숲에
연록의 피가 흐른다
당신 가슴이 당신을 찢고 나오려 하듯이
당신이 항거를 그치고
한 덩이 심장이 되고 말듯이
녹색은 온 세상을 제 굳건한 자리에서
터질 듯 나타나게 한다
온 세상이 다시 온 세상을 정신없이
찾아내게 한다
녹색은 녹색이 죽은 땅을 지나 여기 왔고
폭설의 계엄령을 뚫고 여기 왔고
녹색이 죽은 땅을 선 채로 해방시키고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어디에도 없지만
당신의 아픈 대지를 흐르는 건
모두 새로 난 것들이다
신덕룡, 동지
폭설이다. 하루 종일
눈이 내려 집으로 가는 길이 지워졌다
눈을 감아도 환한 저 길 끝
아랫목에서 굽은 허리를 지지실 어머니
뒤척일 때마다 풀풀, 시름이 날릴 테지만
어둑해질 무렵이면 그림자처럼 일어나
홀로 팥죽을 끓이실 게다
숭얼숭얼 죽 끓는 소리
긴 겨울밤을 건너가는 주문이리라
너무 낮고 아득해서
내 얇은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눈 그늘처럼 흐릿해서 들여다볼 수 없다
함기석, 검은 구두
공원 벤치 밑에 구두 한 짝
새처럼 잠들어 있다
벤치 위엔 남자
신문지를 덮고 잠든 둥근 둥지
죽은 걸까, 꿈꾸는 걸까
검은 구두 속에서
하얀 물감 빛깔의 새벽이 흘러나와
남자의 몸을 수의처럼 감싸고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들 겨드랑이 사이로 샘물이 밀려와
한 방울 한 방울 신문지에 떨어지고
어린 꽃들이 단발머릴 흔들며 웃는다
누구의 입일까 검은 구두
구두 속에서 흰 말이 날아오르고
밤사이 대기가 흘린 꿈이
남자의 입술 끝에 투명한 핏방울로 맺혀 있다
유안진, 노랑말로 말한다
신문이 빈 벤치에 앉아 자꾸 손짓한다
가 앉아 펼쳐드니 은행잎들 떨어져 가린다
읽을 건 계절과 자연이지
시대나 세상이 아니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