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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절(May-Worker's-Labor Day)의 유래
게시물ID : history_866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저녁즈음에
추천 : 10
조회수 : 59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5/01 03:11:56

 

역시나 구글의 센스~!

 

한때 풋풋하고, 지금도 섹시한 니콜 키드먼

 

 

 

1. 배경

 

영화 '파 앤드 어웨이', 그러니까 지금의 니콜 키드먼이 훨씬 풋풋하고 아름다웠을 그 시절에 찍은 론 하워드 감독의 영화이다.

이 영화의 배경은 1892년이다. 아일랜드 대지주의 딸과 아일랜드 소작농의 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오지만 가진 은수저를 당일 모조리 날리고 하층 노동민으로서 미국에 적응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재미있는 장면은 태어나서 걸레 한 번 빨아 본 적이 없는 영화 속 니콜 키드먼이 살기 위해 닭털을 뽑기 시작하는 순간부터이다. 방세를 내기 위해 고고한 대지주의 딸이 동전부터 아끼기 시작하고, 속옷에 돈을 꼬질꼬질하게 모으기 시작한다.

일주일 꼬박 닭털을 뽑고, 여타 부업을 해야 여관방 방세를 내고 입에 풀칠하는 것이 당시 미국 이민 노동자들의 삶이었다. 일주일 대략 7~8달러를 벌기 위해 대다수의 못 배운 노동자들은 등골이 휘어지도록 일을 하는 반면, 자본가들은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를 피울 정도로 양극화가 심한 천민 자본주의, 자유방임주의의 시대였다.

 

 

당시 노동환경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영화 <Far And Away>를 보길 권한다.

 

 

대부분 노동자들은 하루 12~16시간의 노동을 했고, 그렇게 일해야 기껏 7~8달러를 벌 수 있었다. 보스턴이나 시카고 같은 대도시의 경우 월세가 약 10~15달러였으니 두 주를 꼬박 일해야 방세를 벌 수 있었다.

 

그때 노동자들의 아주 소박한 꿈은 주 8시간, 즉 일주일 48시간 일하고 좀 쉬는 것이었다. 물론 시간당 임금도 올려준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노동시간 줄인다고 임금 줄여버리면 일을 더욱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니 말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노동시간을 줄일 때 임금도 같이 줄여버린다는 오늘날 대한민국 재계의 입장은 이때부터 투쟁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그 노동자들이 과격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칼 마르크스(1883년 사망)가 죽은지 3년 밖에 되지 않았고, 오늘날 공산주의, 사회주의하면 떠오르는 블라드미르 레닌(1870년 태생)이 "노동자"보다는 "여자친구"를 고민하는 시기였다. 물론 그래봤자 안 생겼지만...

아무튼 블라드미르 레닌이 17세에 카잔 대학에 입학하여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심취했고, 역사상으로 1889년에 공식적인 맑스주의자가 되었으니 1886년은 정확하게 마르크스와 레닌의 중간 시점이었다. 그래도 사회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불이 붙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안타깝게도 '파앤드어웨이'의 니콜 키드먼과 탐 크루즈 횽아는 보스턴에서 노동운동에 별 관심 없었나보다..

 

 

 

맥코믹 공장 시위

 

2. 5월의 노동자

 

당시 보수 기득권은 "노동시간을 법률로 정하고 직접 규제를 하는 것은 시장경제에 위반되며, 그것은 노사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노동자들은 "우리는 자본가들의 노예나 부품이 아니라 파트너이다"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다가 1886년 5월 1일. 8만 명의 시카고 노동자들은 시카고의 중심인 미시건가에서 파업 집회를 했다. 5월 1일은 본래 May Day 축제일이었다. 양을 키우는 영국에서는 5월 1일에 메이폴(maypole)을 세우고 가축을 방목하기 시작하는 여름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였다. 또한 마을의 젊은 남녀 사이에서 메이퀸과 킹을 뽑아 짝을 지어주는데, 미국에서도 이러한 풍습이 전래되어서 5월 1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했는데, 그 덕택에 8만 명이 모일 수 있었다.

 

당시에 노동자들의 주장은 사회주의니 공산주의와 같은 사상과는 전혀 관계 없었고, 그저 "노동시간 좀 줄여주세요"가 전부였다. 정말 별 것이 없는 시위였다. 하지만 이틀 뒤부터 아주 별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5월 3일 노동자들은 맥코믹 공장으로 가두시위를 하여 집회를 하게되었는데, 사측은 집회에 동조하지 않는 노동자들로 공장을 가동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주 평화스럽게 집회가 되다가 사측 노동자들의 교대시간이 되었을 때 일이 터졌다. 연설로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교대를 위해 퇴근하던 사측 노동자들을 본 다른 노동자들의 눈이 뒤집혔던 것이다. 당연히 그들의 입장에서는 배신자(traitor)였던 사측 노동자들이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퇴근하는데 아드레날린이 솟구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튼 충돌 일보 직전에 시카고 경찰은 대형 삽질을 한 건 터트리게 된다. 그저 저지하면 될 일을 발포를 해서 노동자 두 명을 사살해버린 것이었다.

 

이 소식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주저하고 있던 여타 노동자들과 심적으로는 지지하지만 생계 때문에 사측 노동자로 일을 했던 사람들에게도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시카고 데일리 뉴스는 공산주의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사건을 호도했지만 막상 다음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총 30만 명의 노동자가 시카고 전역에서 쏟아져나왔다. 그들은 헤이마켓 광장(Heymarket Square)에 모여서 경찰에 대해 항의하며, 8시간 주 48시간 노동, 노동 환경 개선을 주장하며 집회를 이어갔다. 당시에 미국법률상 야간 집회는 허가제였다. 왠지 140여년 뒤의 우리나라와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ㅠ.ㅠ) 당시 시카고 시장이었던 카터 해리슨(Carter Harrison)은 "평화적 시위"라는 단서 하에 야간 집회를 허가했다.

 

 

당시 카터 해리슨 시카고 시장

 

 

 

3. 음모?

 

비가 오기 시작한 저녁에는 불과 2천여명이 집회에 참석했고, 마지막 연설이 있던 9시 경까지 평화롭게 이어졌다. 시장이었던 카터 해리슨도 현장에 있었는데, 그 또한 10시경 단상에 올라 평화적 시위임을 천명하며, 의기양양하게 집회의 종료를 선언했다. 10시가 넘은 시점에 광장에는 약 3백여명만 남았고, 경찰병력은 176명,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회를 이어가기보다 이제 집으로 향하려던 그 순간 갑자기 경찰이 진압을 하기 시작했다.

 

"국민의 명령이다. 해산하라"

 

이 한 마디에 노동자들은 무차별 폭행을 당하며 진압당하고 있었다. 이때 광장 한 켠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사제 폭탄이 터졌던 것이다. 폭탄이 터지면서 경찰 몇 명이 부상당하자 이번에는 경찰의 눈이 뒤집어졌다. 미국 경찰은 지금이나 그때나 동료들을 공격하면 사정 없이 응징을 했던 것 같다.

 

무차별 발포를 했는데, 어린 소녀를 포함하여 6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경찰 또한 몇 명 사망했는데, 이들은 폭탄이나 노동자 때문이 아니라 같은 경찰의 총에 의해 사망했다.

 

 

 

 

 

 

이로 인해 집회 주동자가 체포되었는데, 웃긴 점은 이들 모두 집회가 종료되고 이미 광장에서 벗어나 집으로 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사제 폭탄이 터지는 장면도 본 적이 없고, 경찰과 집회 참가자들이 어떻게 다투었는지 기억도 없는 사람이었다. 총 8명의 노동 운동 지도자가 체포되었다. 5월 3일 맥코이 공장 사건으로 노동운동과 집회에 호의적이었던 여론도 급속히 냉랭해졌다. 테러범으로 간주된 지도자들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현장에 있지도 않았으나 지도자라는 이유만으로 배후로 지목되었다. 8명 중 7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고, 체포에서 판결까지 너무 일사천리로 진행되자 항간에는 음모라는 시각도 생겨났다. 결국에 5월 4일 헤이마켓광장 사건은 미국사의 첫번째 적색공포(Red Scare)가 되었다. 비록 레닌의 공산주의 운동 이전이었지만 세계적으로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에 대해 미국의 주류 언론과 기득권은 상당한 공포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노동운동을 파멸시키기 위한 경찰측의 자작극"이라는 의혹이 있었지만 "테러는 반드시 응징한다"는 여론도 너무 강했다. 증거불충분이므로 사형집행을 중지해달라는 연대서명도 수만명이 있었다. 하지만 세 명만이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 나머지 다섯 명 중 한 명은 감형 대상에서 제외되자 감옥에서 스스로 자살을 했으며, 네 명에게는 1886년 11월 11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노동운동의 지도자였던 알버트 파슨스(Albert Parsons)는 법정 최후 진술에서 다음과 같은 진술을 남겼다.

 

"그렇다. 나는 지금은 비록 임금을 받아먹고 사는 노예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 노예 같은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자신이 노예의 주인이 되어 남을 부리는 것은, 나 자신은 물론 내 이웃과 내 동료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중에 하나다. 만약에 인생의 길을 달리 잡았다면 나도 지금쯤 시카코 시내의 어느 거리에 호화로운 저택을 장만하고 가족과 더불어 사치스럽고 편안하게 살수 있었을 것이다. 노예들을 나 대신 일하도록 부려 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걷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여기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이것이 내 죄인 것이다."

 

"파업하는 노동자에게 폭탄을 던지라고 말한 것이 누구인가? 독점 자본가들이 아닌가? 그렇다. 그들이 주모자들이다. 5월 4일 헤이마켓 광장에 폭탄을 던진 것은 바로 그들이다. 8시간 노동 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뉴욕에서 특파된 음모자들이 폭탄을 던진 것이다. 재판장, 우리는 단지 그 더럽고 악랄무도한 음모의 희생자들이오."   

 

 

 

 

집회를 주도한 8인

 

 

 

알트젤드 주지사를 풍자하는 삽화

: 헤이마켓광장 사건의 3인에 대한 석방을 자유와 평화를 위협하는 개를 풀어주는 것으로 묘사했다.

 

 

알트젤드 일리노이 주지사

 

 

 

4. 노동절의 탄생

 

11월 11일 네 명의 지도자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후, 1889년 7월 제 2회 인터네셔널 창립 대회에서 5월 1일 시카고 집회를 기념하기 위해 그 날을 노동절로 정하고, 전 세계에서 8시간 노동 확립을 위한 시위를 하기로 결의했고, 그것이 노동절의 기원이 되었다. 그리고 1890년 5월 1일 제 1회 노동절 행사가 거행되었다.

 

시간이 흘러 1893년 새로 선출된 알트젤드(John Altgeld) 일리노이 주지사는 증거불충분에 대한 참작을 하여, 복역 중인 세 명을 석방하게 되었는데, 연일 여론은 좋지 않았다. 알트젤드 주지사는 언젠가는 유죄에 대한 증거가 조작되었다는 진실이 알려져 자신의 정치적 위상이 회복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명백한 오판이었다. 7년이 흐르는 시간 동안 미국 주류 사회에는 적색 공포가 강화되었다. 알트젤드의 정치적 생명은 그걸로 끝났고, 다시는 정계에 되돌아올 수 없었다.

 

1886년 헤이마켓 사건은 단순한 노동시위를 노동절로 기념하게 만든 중대한 사건이지만 현재에는 별다른 기념 흔적이 없다. 처음에는 "국민의 명령은 평화를 원한다"라는 문구를 가진 경찰 동상이 1889년 5월 4일 헤이마켓 광장에 세워졌지만 노동자들은 "알트젤드의 동상도 함께 세워달라"로 주장하는 등 반발에 시달리다가 1927년 5월 4일 지나가던 차량이 돌진해 동상이 파괴되었다. 우연치고는 좀 석연치 않지만 말이다.

이후 몇 번 동상을 세웠지만 그때마다 폭파되는 사건이 생겨서 현재에는 표지석 하나만 있고,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또한 1886년 5월 4일 저녁 10시 경 헤이마켓 광장에서 사람들을 향해 사제 폭탄을 터트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1886년 5월 4일 노동자들이 요구했던 "일일 8시간 주 48시간 노동시간"이라는 노동 환경 개선 요구는 무려 반세기가 지난 1938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연방법으로서 모든 일터에 강제 적용되도록 "공정노동기준법(주 44시간)"이라는 이름으로 법제화되었다. 1940년에는 주 40시간으로 줄어들게 된다.

 

 

 

 

 

 

 

 

* 참고로 필자는 대학시절에 노동운동 한 번 해 본 적도 없고, 스스로 보수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오해 없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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