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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청산행
손 흔들고 떠나갈 미련은 없다
며칠째 청산에 와 발을 푸니
흐리던 산길이 잘 보인다
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인가(人家)를 내려다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칫솔을 생각한다
남방(南方)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
두어 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
산 아래는 때까치들이 몰려와
모든 야성(野性)을 버리고 들 가운데 순결해진다
길을 가다가 자주 뒤를 돌아보게 하는
서른 번 다져 두고 서른 번 포기했던 관습들
서쪽 마을을 바라보면 나무들의 잔 숨결처럼
가늘게 흩어지는 저녁 연기가
한 가정의 고민의 양식으로 피어오르고
생목(生木) 울타리엔 들거미줄
맨살 비비는 돌들과 함께 누워
실로 이 세상을 앓아 보지 않은 것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
안오일, 꽃사주
증심사 오르는 참꽃 길
마악 한 쌍의 나비
자리를 털고 내려간다
사주, 기일, 궁합 펼쳐놓고
오르고 내리는
생의 갈피 엿보고 있던 한 노인
활짝 핀 참꽃 보며
회한의 가락으로 중얼거린다
내년에도 다시 필 저 꽃만큼
더 좋은 사주가 어딨을꼬
이은봉, 삼베빛 저녁볕
삼베빛 저녁볕, 자꾸만 뒷덜미 잡아당긴다
어지럽다 아랫도리 갑자기 후들거린다
종아리에 힘 모으고 겨우겨우 버티고 선 채
흐르는 강물, 물끄러미 바라본다
산언덕을 덮고 있는 조팝꽃처럼
마음 몽롱해진다 낡은 철다리조차
꽃무더기 함부로 토해 놓는 곳
간이매점 대나무 평상 위 털썩 주저앉는다
싸구려 비스킷 조각조각 떼어먹으며
따스한 캔 커피 질금질금 잘라 마신다
초록 잎새들, 팔랑대는 저 아기 손바닥들
바람 데려와 코끝 문질러댄다
쿨룩쿨룩, 삼베빛 저녁볕 잔기침하는 사이
강마을 가득 들뜬 발자국들 일어선다
싸하게 몸 흔들며 피어오르는 철쭉꽃들
벌써 물속의 제 그림자 까맣게 지우고 있다
이경, 머리에 새를 얹은 나무
표적이 되고 싶은 거야
서릿발 묻은 갈퀴로 불현듯 하강하는 새의
번개같이 내리꽂히는 단호한 부리
검고 광활하게 빛나는 눈
새가 물어 오는 높고 차가운 자유
그쪽에서 시위를 맞추어 활을 당기는 일은 자주 오지 않아
그건 순전히 오랜 지혜의 선택이야
내겐 새를 불러들이거나 잡아 둘 손이 없어
언제 푸드덕 꿈을 깨고 날아오를지 그걸 몰라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
품고 있으면서 갖지 않는 것
보지 않으면서 잊지 않는 것
새의 사생활을 살짝 가려 주는 거
저녁 무렵 먼 벌판 쪽으로 날아간 새가
마른 풀줄기를 물고 돌아와 집을 지을 때까지
천 개의 팔을 올리고 이렇게 서 있을밖에
문충성, 허공
원래 하늘은 비어 있습니까
누가 처음 하늘을 '허공(虛空)'이라 불렀습니까
그 허공을 찾아 얼만 많은 사람들이 길 떠났습니까
그러나 허공은 비어 있어 끝내 찾지 못했습니까
비어 있는 것들은 그러므로 찾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비어 있는 하늘은 비어 있는 대로 그냥 있습니까
허공을 찾는 이들
길에서 저물어
빈 길 되듯
그러나 한 번도 허공을 찾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까
비행기나 만들어 띄우며
아스팔트 신작로나 만들며
30년 동안 줄곧 나는 허공을 찾았습니까
나는 허공을 찾지 못합니까
아아, 허공 하나가
눈으로 들어와
가슴 속에
한 가득 허공을 만듭니까
만듭니까 허공이
새로운 허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