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민, 책의 등
책꽂이에 책들이 꽂혀 있다
빽빽이 등을 보인 채 돌아서 있다
등뼈가 보인다
등을 보여주는 것은
읽을거리가 있다
아버지가 그랬고
어머니가 그랬다
절교를 선언하고 뛰어가던
애인이
한 시대와 역사가 그랬다
등을 보이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다
잠깐 다른 곳을 보는 것이다
옷을 갈아입는 네가
부끄러울까봐
멋쩍게 돌아서주는 것이다
오정국, 겨울 강
스스로를 결박하듯 팔다리를 오그려 붙이고
돌과 나무와 모래를 삼켜
그 열마저 빼앗아 가둔 뒤
무릎 꿇고 엎드린
겨울 강
얼어 터진 강
번쩍이는 등허리, 그 맡바닥의
맨 밑바닥의 굴곡대로 제 몸을 구겨 넣은
침묵의 마디마디
비로소 입을 봉해
건져 올린
팔다리가 사방으로 찍겨 나가는 고요의
고요의 팽팽한 표면장력들
손택수, 얼음 이파리
얼어붙은 연못 위에 낙엽이 누워 있다
얼음에 전신을 음각하는 이파리
파고 들어간 자리가
움푹하다
끌도 정도 없이
살갗을 파고드는 비문이 있다면
비문도 나의 살점이 아니겠는가
말을 안으로 감추어버린 백비
속에서 말을 꺼내듯
빙판을 어루만지는 손
덜 아문 딱지라도 뜯듯
이파리를 걷어내자
얼음 속으로 실핏줄이 이어진다
따끔따끔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잎맥이 돋아난다
이수명, 보법
나는 걸어간다
걸어간다. 걸어간다
맨땅을 알지 못한 채
누군가의 크고 검은 발 위에
내 발을 얹고
걸어간다
누군가의 크고 검은 발 위에
내 발을 얹고
공회전한다
땅이 갈라져도 알지 못한 채
그 발이 나를
증언하도록
나는 그와 동시에
움직인다
김광규, 가을 거울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고 난 뒤
땅에 떨어져 나뒹구는 후박나무 잎
누렇게 바래고 쪼그라든 잎사귀
옴폭하게 오그라진 갈잎 손바닥에
한 숟가락 빗물이 고였습니다
조그만 물거울에 비치는 세상
낙엽의 어머니 후박나무 옆에
내 얼굴과 우리 집 담벼락
구름과 해와 하늘이 비칩니다
지천으로 굴러다니는 갈잎들 적시며
땅으로 돌아가는 어쩌면 마지막
빗물이 잠시 머물러
조그만 가을 거울에
온 생애를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