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란, 새들에 대한 오해
새들의 본적은 잘못 적혔다
새가 평생 허공을 나는 건 아니다
먹이를 구하기 위한 비감이거나
살기 위해 아슬한 허공으로 오르는 것이다
새들에게 모든 길이 열려진 것은 아니다
몸에 새겨진 오랜 습성으로 길을 떠나는 것
위험을 경계하고 길을 내는 사냥터일 뿐
날개 없는 생각으로 새들을 자유롭다고 하지말자
땅을 딛고 나무에 내리고 바위에 둥지를 틀고
수풀 속 은신처로 보호구역을 만드는 일
생을 위해 혹은 새끼를 위해 날마다
절실함으로 날아오르는, 새일 뿐이라는 것
누가 새의 본적을 하늘이라고 했는가
순명에 귀 기울이는 것들만 비로소 하늘로 간다
온 생을 다한 것들이 단 한번 날아
하늘로 간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채강, 꼭
그대가 날마다 내게로 오고 있다 하여
나는 날마다 그대를 기다렸다
그대는 날마다 나를 만나고 갔지만
나는 한 번도 그대를 만나지 못했다
그대는 날마다 나와 헤어졌지만
나는 한 번도 그대와 헤어지지 못했다
내가 그대와 그렇게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한 번도 헤어진 적 없다는 건
그대가 나와 그렇게 매일 만나고
매일 헤어졌다는 건 참 얼마나 고단한 일이냐
그렇게 만나지 못하고
헤어지지 못한 우리의 나날들은
또 얼마나 가슴 여위던 시간인가
우리 한번은 꼭 만나기로 하자
만나서 꼭 헤어지기로 하자
강인한, 강변북로
내 가슴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이 지나갔다
강물을 일으켜 붓을 세운
저 달의 운필은 한 생을 적시고도 남으리
이따금 새들이 떼 지어 강을 물고 날다가
힘에 부치고 꽃노을에 눈이 부셔
떨구고 갈 때가 많았다
그리고 밤이면
검은 강은 입을 다물고 흘렀다
강물이 달아나지 못하게
밤새껏 가로등이 금빛 못을 총총히 박았는데
부하의 총에 죽은 깡마른 군인이, 일찍이
이 강변에서 미소 지으며 쌍안경으로 쳐다보았느니
색색의 비행운이 얼크러지는 고공의 에어쇼
강 하나를 정복하는 건 한 나라를 손에 쥐는 일
그 더러운 허공을 아는지
슬몃슬몃 소름을 털며 나는 새떼들
나는 그 강을 데려와 베란다 의자에 앉히고
술 한 잔 나누며
상한 비늘을 털어주고 싶었다
권숙월, 어둠의 시간
집 뒤 대숲에 어둠이 칠해졌다
처음엔 희미해서 붓을 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시작되니 금방이었다
수많은 잎이 지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숲이 통째로 지워졌다
밖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사라졌다
내가 보지 못한 다른 날도 저랬겠지
서재 맞은편 오래된 대숲이
더 이상 못 참겠다고
어둠의 품에 진하게 안겼다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경계가 없어졌다
허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은봉, 걸어다니는 별
사춘기를 너무 심하게 겪다가
한순간에 땅에 떨어진 별
지금은 땅 위를, 먼지 나는 흙바닥 위를
터덜터덜 걸어다니는 별
더러는 뒹굴뒹굴 굴러다니기도 하는 별
아무도 별인 줄 모르는 별
하늘에서 반짝이지 못하고
땅바닥 위로 굴러 떨어진 별
젖은 낙엽 속에, 마른 풀잎 속에
제 아픈 몸 숨기고 있는 별
별 모양의 목걸이가 아닌
별 모양의 귀고리가 아닌 진짜 별
때로는 별 자신도
자기가 별인지 모르는 별
그래도 내게는
별처럼 귀하고 소중한 별
당신에게도 역시 귀하고 소중한 별
너무 지친 내 가슴속에도 살아 있고
너무 힘든 당신 가슴속에도 살아 있는
둔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별
진실이라는 사랑이라는 꿈이라는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