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JoJAtF4G7aQ
손택수, 일획
들판에 비가
비문을 읽는다
읽는 일은
지우는 일
속으로 삼키고 삼켜서
모래알로 출가시키는 일
탁본을 떠도 뜻을 알 수 없는
한 이백 년쯤 묵은 글자가
달싹거린다
흙먼지를 품은 글자 속에서
돋아난 싹
지워지고 지워져서 푸른
삐침
획 끝에
꽃이 벙근다
진란, 혼자 노는 숲
봄꽃들이 앞 다투어 피고지고
그렇게 후다닥 지나갔다
항상 가던 그 자리를 다시 걸어가며
산목련 함박 웃는 모습을 보렸더니
그새 지고 없어, 아차 늦었구나 아쉬운데
어디서 하얀 종소리 뎅뎅뎅 밀려온다
금천길 푸른 숲 사이로 때죽거리며 조랑거리는 것들
조그만 은종들이 잘랑잘랑 온몸에 불을 켜고 흔들어댄다
순간 왁자해지는 숲, 찌르르, 찌이익, 쫑쫑거리는 새소리들
금천 물길에 부서져 반짝이는 초여름의 햇살, 고요를 섞는
바람, 나를 들여다보는 초록눈들이
환생하듯 일제히 일어서는 천년 비룡처럼
혼자 노는 숲에 혼자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숲에는 많은 것들이 혼자였다
내가 없어도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들
고맙다
오명선, 우기의 배경
먹구름이 무거운 이유는
산란되지 못한 빛의 무게 때문이다
저기압의 행로를 결정짓는 건 오로지 바람뿐
빌딩의 긴 그림자를 건너온 구름들
착지할 곳을 찾고 있다
바람에 밀려 유산(流産)이 되어버린 하늘이
조각조각 흘러내린다
나는 과연
수직의 통증을 곡선으로 견딜 수 있을까
수많은 낙뢰를 삼키며 살아온 피뢰침과 평행일 수 있을까
꺾인 날개를 쓰다듬으며
저물어가는 계절을 둥글게 끌어안아야 한다
빗방울이 생각을 밟아가는 동안
한 다발의 먹구름이 현관문을 밀고 들어선다
그렇게
또 다시 우기가 무릎까지 차오르고
입을 꽉 다문 내 침묵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우르르 쾅쾅
어둠의 배경 위로 떠오르는 풍경이
네 혀처럼 붉다
배영옥, 상 위의 숟가락을 보는 나이
사람들은 가까운 사이임을 강조할 때
그 집 숟가락 숫자까지 다 안다고들 한다
그 말이 단순히 숟가락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마흔 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 생애는
두레밥상 위에 숟가락을 놓으면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숟가락들
어제 옆집 아버지 친구는
서낭당 언덕에서 돌멩이에 걸려 돌아가시고
건넛집 아이엄마는 오늘 딸 쌍둥이를 낳았다
나도 이제 상 위의 숟가락에 숨은 배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나이
수저통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숟가락을
상 위로 옮기는 가벼운 노동을
아직 생각이 어린 아이들에게 시킨다
몸과 생각에 물기가 많은 아이들은
죽음과 생의 신비가 숟가락에 있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한다
따닥따닥 말발굽 소리를 내며
아이는 상 위에 숟가락을 식구 수대로 가지런히 놓고 있다
눈대중으로 숟가락 숫자를 헤아려본다
가장 귀중한 숟가락을
나는 이미 스무 살에 잃은 적이 있다
최동호, 세상구경
호랑나비 등에 작은 낚시 의자 하나 얹어 놓고
난만하게 피어 있는 꽃밭 사잇길 건들건들 날아다니며
낚시 대롱 길게 내려 꽃잎 속 부끄러운 속살 이리저리 뒤지다가
꽃가루 묻은 얼굴로
세상 나들이, 햇빛 낚시 다 마치면
미련 없이 시든 꽃잎 속에 들어가 까만 씨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