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식, 그 섬
어느덧 항구에 닿았구나
닻을 내려야겠다
숨가빴던 뱃길
바다 위 안개 자욱하다
구름 위로 떠다니는 그림자
꿈이었던가
다가올 듯 다가오지 않고
말없이 고개 끄덕이며
손 흔들어 보이기만 하는
물결에 밀려 점점 멀어져 가는
작은 쪽배 하나
이근화, 우리는 같은 이름으로
나는 자전거를 타는데
발을 굴리면서
왜 트럭은 먼지를 일으키고
승용차는 저리도 검은가 생각하는데
바퀴들이 눈 같고 입 같다
나는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
당신에게 조금 더 많은 말을 하고
가끔은 어깨나 팔꿈치를 툭툭 쳐보기로 할까
말을 하면서도 마음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마음을
선물처럼 줄 수 있다면 좋겠다
더 자주 더 열심히 생각한다는 것이
당신에게 위로가 될까
위로의 끝에 새로운 이름이 고개를 들까
우리는 서로 다른 속도로 취하고
가로등이 두 개로 세 개로 무너지고
모서리가 둥글어지고
신발이 숨을 쉰다
우리는 같은 이름으로 자전거를 타자
바퀴를 굴리면 쏟아지는 달콤한 풍경들이
우리를 지울 때까지
우리의 이름이 될 때까지
이대흠, 젓갈
어머니가 주신 반찬에는 어머니의
몸 아닌 것이 없다
입맛 없을 때 먹으라고 주신 젓갈
매운 고추 송송 썰어 먹으려다 보니
이런
어머니의 속을 절인 것 아닌가
이창수, 열쇠 꾸러미
서랍을 정리하다가 열쇠 꾸러미를 보았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하나둘 모아둔 것들이
한 꾸러미나 되었다
녹이 슨 열쇠를 만지작거리다 보니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빈방들이 생각났다
하지만 옛 시절이 그리운 것도 아니어서
열쇠 꾸러미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철렁
열쇠들이 소리를 질렀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간 열쇠들이
나를 큰 소리로 불렀다
나를 여기까지 대려다주고 돌아가는
순한 짐승들이
나를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것만 같았다
철렁
죄를 지은 것처럼 가슴이 저려왔다
고영민, 극치
개미가 흙을 물어와
하루종일 둑방을 쌓는 것
금낭화 핀 마당가에 비스듬히 서보는 것
소가 제 자리의 띠풀을 모두 먹어
길게 몇번을 우는 것
작은 다락방에 쥐가 끓는 것
늙은 소나무 밑에
마른 솔잎이 층층 녹슨 머리핀처럼
노랗게 쌓여 있는 것
마당에 한 무리 잠자리떼가 몰려와
어디에 앉지도 않고 빙빙 바지랑대 주위를 도는 것
저녁 논물에 산이 들어와 앉는 것
늙은 어머니가 묵정밭에서 돌을 골라내는 것
어스름 녘
고갯마루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우체부가 밭둑을 질러
우리 집 쪽으로
걸어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