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진, 꽃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에
아픈 피 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어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리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靜寂)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湖心)아
최하연, 핀볼
편의점과 편의점 사이에
미루나무가 있었다
바람이 허리를 꺾어놓아도
미루나무는 새의 둥지를 놓지 않았다
덜컹거리는 세계로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둥지와 둥지 사이엔 달이 있었다
눈보라가 둥지를 흔들고는
바닥을 뒤졌다
중력이 모자라 날개는 자유다
날개와 날개 사이에 안개가 있었다
달무리를 걷어낸 손가락이 얼얼했다
덜컹거리는 세계가 반짝였다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엔
녹슬어 못 쓰게 된 거울이
거울과 거울 사이엔 네발 달린 짐승이
달을 물어뜯고 있었다
이영광, 장화 같은 몸
머리 아래에
가슴이 있고
가슴 밑엔 허리가
허리 아래가 있다
어지러운 머리는 묻는다
가슴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허리 아래는 무슨 이유가 있는가
들끓는 풍랑이었다가
흐트러진 매무새로 기근처럼 지쳐 잠든
머리 아래는
흙탕물이 괴어 벗겨지지 않는 장화 같은
몸은
왜 늘 몸부림인가
묻는다, 몸의 물음이라곤
한마디도 들어본 적 없는 허공의
대가리가
이태수, 마음눈
이른 아침, 창밖에는
산허리 감싸 안은 물안개
산발치 외길엔 밤을 지새운 가로등이
흐릿한 불빛을 흘리고 있다
며칠째 지독한 몸살
길 잃고 제자리걸음이나 뒷걸음질하는
마음이 더 아프다
벽 앞의 마음눈이 더 캄캄하다
눈을 감고 신열(身熱) 깊숙이 들어간다
간밤 악몽 속의 망나니들이
마냥 그대로 칼춤을 추고 있다
눈을 떠봐도 여전히
모든 문도 길도 어두운 벽이다
마음눈은 여전히 벽 속이다
이상국, 물푸레나무에게 쓰는 편지
너의 이파리는 푸르다
피가 푸르기 때문이다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잎 뒤에 숨어 꽃은 오월에 피고
가지들은 올해도 바람에 흔들린다
같은 별의 물을 마시며
같은 햇빛 아래 사는데
네 몸은 푸르고
상처를 내고 바라보면
나는 온몸이 꽃이다
오월이 오고 또 오면
언젠가 우리가 서로
몸을 바꿀 날이 있겠지
그게 즐거워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