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림, 연꽃
더는 실망하지 않고
두 번 다시 들먹이지 말고
그대를 품을 수 있도록
나를 비우고 비운다
뼈를 깎는 아픔으로
상처를 삭이고 미움을 죽이고
푹 썩어 문들어지도록
마침내 한없이 부드럽고
더없이 살가워진 진흙 가슴에
깊이 뿌리 내리고
진정 용서하는 마음이
밝고 아름답게 피어나면
저와 같지 않을까
오므린 두 손이 만나듯
만월(滿月)의 합장(合掌), 성스럽다
문정영, 정물화
한낮에 아이가 4B연필로 그리는 밑그림 속으로
나는 거미가 되어 기어 들어갔다
금세 흰 도화지에는
네거티브필름 같은 윤곽이 드러나고
나는 오래된 거미줄 위에서 뼈뿐인
이파리 사이를 오가며 흔들거렸다
곧은 어깨를 펴고
꽃을 받쳐 든 둥근 줄기에도
내 몸의 허무가 닿았다
깨진 화분의 사금파리에서
뿜어 올라오는 한 줄기 빛에
다른 세상을 생각하던 눈이 감겼다
갈색보리잠자리가
내 입 속에서 날개치고 있었다
엑스레이에 찍힌 검은 꽃대의
금간 갈비뼈, 누군가 애초에
줄기가 부러진 나무를 그린 것일까
4절지 도화지 속에 뿌리 내린
삶을 재생시키는 꽃화분 하나
나는 그 동안 부러진 나무의 그림자를
거미줄로 감싸고 있었을 뿐이다
김용옥, 밥숟가락
밥숟가락은
비어 있어서 밥을 뜬다
그리고
사람을 살게 하기 위하여 비워진다
너는
누구의 밥숟가락이냐
이대흠, 꽃 지네요
꽃 지네요
꽃 지네요
당신이 없는데
당신도 없는데
히뿍
히뿍
꽃 피더니
벼랑 바위에 날 엎지르듯
꽃 지네요
꽃 지네요
문태준, 언제 또 여러번
왼 손목의 맥을 짚으며 비를 보네
물통을 내려놓고 비를 보네
이 비 그치면 낙과(落果)를 줍게 되리
천둥 우는 소리는 처음엔 높고 나중엔 낮아지네
계곡물은 비옷을 입고 급하게 내려오네
오늘 칡넝쿨같이 뻗어가는 구름 아래를 지나며
언제 또 소낙비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네
쏟아짐이여
여러 번의 오후는 여름 위에
여러 번의 여름은 일생(一生) 위에
이처럼 쏟아진다 할 밖에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이 질펀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