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칠환, 언제나 지는 내기
소나무는 바늘 쌈지를 한 섬이나 지고 섰지만
해진 구름 수건 한 장을 깁지 못하고
참나무는 도토리구슬을 한 가마 쥐고 있지만
다람쥐와 홀짝 내기에 언제나 진다
눈 어둔 솔새가 귀 없는 솔잎 바늘에
명주실 다 꿰도록
셈 흐린 참나무가 영악한 다람쥐한테
도토리 한 줌 되찾도록
결 봄 여름 없이 달이 뜬다
최승헌, 계란 반숙
사랑은 계란 반숙이다
제대로 익지 못하면 껍질에 달라붙어
슬쩍 가버리는 이별처럼 허황하다
한순간 감정이 휘청거려도
처음부터 뜨거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사랑의 빛깔에 속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사랑이 미온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고온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탐색이다
아무리 달콤한 수식어를 늘어놓아도
서둘러 익힌 것은 그 속을 알 수 없기에
자존심과 경계의 온도를 적당히 조절하며
천천히 마음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쪼그라들었는가 싶었는데
여전히 팽팽한 것이 사랑이며
갑자기 냉기가 온기로 바뀌는 변덕이 사랑이다
하지만 단단하지 못해 물러터진
당신의 마음이 타이밍을 놓친다면
사랑이 완숙되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이승하, 지하도 계단을 내려가는 햇볕
지하도 계단에 설치된 기계가 고장났다
가파른 삶
지나가던 사람이 그를 업었다
덜렁거리는 두 발
다른 두 행인이 빈 휠체어를 들었다
휠체어에 앉았던 그의 어머니
네 사람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햇볕이 지하도 깊숙한 데까지 따라 내려갔다
이향아, 먼지와 햇살
햇살 바른 집으로 옮겨 왔더니 참 성가시네
옷만 갈아입어도 부옇게 따라오며 설치는 먼지
부스러진 터럭과 살비듬
모두 내게서 떨어지고 있는 걸 까맣게 몰랐었네
썩었어, 세상이 미쳤나봐, 개탄하는
내 모든 숨구멍에서 냄새가 난다는 것을
시시각각 나도 썩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었네
햇살이 밝을수록 먼지는
함께 죽자, 함께 죽자 목매다는 시늉으로
일제히 일어나서 고자질을 하네
한낱 먼지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나를
삼대를 적선해야 남향집에 산다지만
컴컴한 골방이 차라리 속은 편했네
그늘에 숨는다고 먼지가 없었겠는가
나하나 없어진다고 세상이 달라지겠는가
먼지를 고발하는 햇살 저 부신 눈
사방으로 터진 난장에서
나를 판결하는 저 맑고 지엄한 눈
아직 망하지 않고 하루하루 지탱하는 것 요술 같네
다 덕분인 줄은 알지만
나 자꾸만 햇살이 두렵네
이광석, 거룩한 마침표
어느 날 달이 바닷속에서
첨벙첨벙 걸어 나왔다
고요에 취한 달빛이
방파제 아래 누웠다
어머니가 치매에 업혀
세상 밖으로 나가시던 날
바다는 하루 종일 달을 안고 울었다
그 마지막 달빛 한 조각 움켜쥔
어머니의 이승이 조용히 문고리를 놓았다
그 누구도 보지 못한 거룩한 마침표
내 가슴에 작살처럼 꽂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