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석, 탑
천년을 지고 온 하늘의 무게
잠시 내려놓는 사이
열반에 올라앉은
백목련 한 송이
벙글 미소의 시간도 놓친 채
하얗게 벗은 고뇌
돌탑으로 몸 덮었다
정한아, 어른스런 입맞춤
내가 그리웠다더니
지난 사랑 이야기를 잘도 해대는구나
앵두 같은
총알 같은
앵두로 만든 총알 같은
너의 입술
십 년 만에 만난 찻집에서 내 뒤통수는
체리 젤리 모양으로 날아가버리네
이마에 작은 총알구멍을 달고
날아간 뒤통수를 긁으며
우리는 예의바른 어른이 되었나
유행하는 모양으로 찢고 씹고 깨무는
어여쁜 입술을 가졌나
놀라워라
아무 진심도 말하지 않았건만
당신은 나에게 동의하는군
이홍섭, 등대
나 후회하며 당신을 떠나네
후회도 사랑의 일부
후회도 사랑의 만장 같은 것
지친 배였다고 생각해주시게
불빛을 잘못 보고
낯선 항구에 들어선 배였다고 생각해주시게
이제 떠나면
다시는 후회가 없을 터
등 뒤에서, 등 앞으로
당신의 불빛을 온몸으로 느끼며
눈먼 바다로 나아갈 터
후회도 사랑의 일부
후회도 사랑의 만장 같은 것이라
나 후회하며
어둠 속으로 나아가네
구석본, 그리움
나의 애인은 언제나 만 리 밖에 서있다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사랑한다’ 하면
사랑밖에 서 있고
‘그립다’ 하면 그리움밖에 서서
불빛처럼 깜빡이며
나의 가슴을 깨우고 있다
나의 그리움이 만 리까지 쫓아가면
또, 만리 밖에서는 나의 애인아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이승에서 풀리지 않는 그리움 하나뿐인 것을
만리 밖에서 보내는
불빛 같은 그대 신호로 비로소 안다
이수익, 길일(吉日)
보도블록 위에
지렁이 한 마리 꼼짝없이
죽어 있다
그곳이 닿아야 할 제 생의 마지막 지점이라는 듯
물기 빠진, 수축된 환절(環節)이 햇빛 속에 드러나
누워 있음이 문득 지워진 어제처럼
편안하다
부드럽고 향기로운 흙의 집 떨치고 나와
온몸을 밀어 여기까지 온 장엄한 고행이
이 길에서 비로소 해탈을 이루었는가
금빛 왕궁을 버리고 출가했던 그
고타마 싯다르타같이
몸 주위로 밀려드는 개미떼 조문 행렬 까마득히
하루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