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란, 접안
무엇인가
물처럼 스며들어, 천상의 계절로 찾아들어
생의 몇 날을 머물다 간 적 있다
나는 시력을 잃고 말라갔으며 말을 잊었다
불 밝힌 마음은 아득한 곳을 향해 깃발처럼 흔들거나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옆구리가 닳았다
찢긴 지 오래인 돛
떠밀려온 해초더미에 칭칭 감긴 닻
발이 잘린 내 역사는 빛나고 어두웠다
오르지 못한 채 둥둥
빈 배였다
다가간다는 것은 온몸으로 기댄다는 것은
서글픈 운율로 나를 켜는 일
나를 되려 가두는 일
내게서 다시 내게로 건너가는 일
그리하여 끝까지 남은 나를, 비늘 덮인 나를
바다로 되돌리는 일이었다
다가갈 수 없거나
다가가지 못하던 그때처럼
박주택, 국경
이웃집은 그래서 가까운데
벽을 맞대고 체온으로 덥혀온 것인데
어릴 적 보고 그제 보니 여고생이란다
눈 둘 곳 없는 엘리베이터만큼 인사 없는 곳
701호, 702호, 703호 사이 국경
벽은 자라 공중에 이르고 가끔 들리는 소리만이
이웃이라는 것을 알리는데
벽은 무엇으로 굳었는가
왜 모든 것은 문 하나에 갇히는가
문을 닮은 얼굴들 엘리베이터에 서 있다
열리지 않으려고 안쪽 손잡이를 꽉 붙잡고는 굳게 서 있다
서로를 기억하는 것이 큰일이나 되는 듯
더디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쏘아본다
엘리베이터 배가 열리자마자
국경에 사는 사람들
확 거리로 퍼진다
홍영철, 우리도 익어서
열매가 익어, 익어서 떨어지듯이
우리도 떨어져서 낮게 더 낮게
떨어져서 파묻힐 수 있다면
파묻혀서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다시 기적처럼 푸른 손 흔들며
뽀송뽀송 돋아날 수 있다면
내가 빨아먹은 천도복숭아 씨
싱싱한, 싱싱한
먼 풍경보다 더 아련한 초월도
마른 풀잎처럼 쉽게 부서지는 우리 사랑도
한숨 소리 같은 생활도
비 뿌리듯이 낮게낮게 내린다면
가을에는 우리들도 익어간다면
익어서 썩을 수 있다면
썩어서 다시 몇 갑절로 싹틀 수 있다면
전숙, 주름
개썰매를 몰아 방향을 찾는 이누이트들은
눈의 주름을 보고 길을 찾는다고 한다
설원을 쓸고 간 바람의 발자국이
주름을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머리카락을 추켜올리고
이마의 주름을 활짝 드러내었다
내가 걸어온 바람의 길이
생의 설원에 석 줄 깊은 발자국을 찍어 놓았다
내 뒤에 오는 누군가
이 주름을 더듬어 가면
생의 크레바스를 무사히 비켜갈 수 있으리라
한영옥, 헛생각, 오래 밝았으면
달이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생각
오래전에 아주 내다 버린 줄 알았는데
산성 길 걷다가 마주친 열나흘 좋은 달
자꾸 나를 따라오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거듭 생각되며 나는 또 부푸는 것이었으니
이 허공에 나를 드리워 주시는 그 손길은
나를 얕잡아 헛생각 또 넣어주시는 것이리
얕잡아 보는 눈길, 한두 번 받은 것 아니니
울먹이다 그치고 하늘 한 번 우러르면 되지만
이렇게 자꾸 따라오는 좋은 달을 어찌하나
이 흥 깨고 나면 구만 리 밤길을 어이 갈까
이 길 다 가도록 헛생각 오래 탱탱했으면
이 길 다 가도록 헛생각 오래 밝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