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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생의 몇 날을 머물다 간 적 있다
게시물ID : lovestory_8656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2
조회수 : 48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11/26 11:47:58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8HAnRWMFAio





1.jpg

이향란접안

 

 

 

무엇인가

물처럼 스며들어천상의 계절로 찾아들어

생의 몇 날을 머물다 간 적 있다

 

나는 시력을 잃고 말라갔으며 말을 잊었다

불 밝힌 마음은 아득한 곳을 향해 깃발처럼 흔들거나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옆구리가 닳았다

찢긴 지 오래인 돛

떠밀려온 해초더미에 칭칭 감긴 닻

발이 잘린 내 역사는 빛나고 어두웠다

오르지 못한 채 둥둥

빈 배였다

 

다가간다는 것은 온몸으로 기댄다는 것은

서글픈 운율로 나를 켜는 일

나를 되려 가두는 일

내게서 다시 내게로 건너가는 일

그리하여 끝까지 남은 나를비늘 덮인 나를

바다로 되돌리는 일이었다

 

다가갈 수 없거나

다가가지 못하던 그때처럼







2.jpg

박주택국경

 

 

 

이웃집은 그래서 가까운데

벽을 맞대고 체온으로 덥혀온 것인데

어릴 적 보고 그제 보니 여고생이란다

눈 둘 곳 없는 엘리베이터만큼 인사 없는 곳

701, 702, 703호 사이 국경

벽은 자라 공중에 이르고 가끔 들리는 소리만이

이웃이라는 것을 알리는데

벽은 무엇으로 굳었는가

왜 모든 것은 문 하나에 갇히는가

 

문을 닮은 얼굴들 엘리베이터에 서 있다

열리지 않으려고 안쪽 손잡이를 꽉 붙잡고는 굳게 서 있다

서로를 기억하는 것이 큰일이나 되는 듯

더디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쏘아본다

엘리베이터 배가 열리자마자

국경에 사는 사람들

확 거리로 퍼진다







3.jpg

홍영철우리도 익어서

 

 

 

열매가 익어익어서 떨어지듯이

우리도 떨어져서 낮게 더 낮게

떨어져서 파묻힐 수 있다면

파묻혀서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다시 기적처럼 푸른 손 흔들며

뽀송뽀송 돋아날 수 있다면

 

내가 빨아먹은 천도복숭아 씨

싱싱한싱싱한

먼 풍경보다 더 아련한 초월도

마른 풀잎처럼 쉽게 부서지는 우리 사랑도

한숨 소리 같은 생활도

비 뿌리듯이 낮게낮게 내린다면

가을에는 우리들도 익어간다면

익어서 썩을 수 있다면

썩어서 다시 몇 갑절로 싹틀 수 있다면







4.jpg

전숙주름

 

 

 

개썰매를 몰아 방향을 찾는 이누이트들은

눈의 주름을 보고 길을 찾는다고 한다

 

설원을 쓸고 간 바람의 발자국이

주름을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머리카락을 추켜올리고

이마의 주름을 활짝 드러내었다

 

내가 걸어온 바람의 길이

생의 설원에 석 줄 깊은 발자국을 찍어 놓았다

 

내 뒤에 오는 누군가

이 주름을 더듬어 가면

생의 크레바스를 무사히 비켜갈 수 있으리라







5.jpg

한영옥헛생각오래 밝았으면

 

 

 

달이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생각

오래전에 아주 내다 버린 줄 알았는데

산성 길 걷다가 마주친 열나흘 좋은 달

자꾸 나를 따라오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거듭 생각되며 나는 또 부푸는 것이었으니

이 허공에 나를 드리워 주시는 그 손길은

나를 얕잡아 헛생각 또 넣어주시는 것이리

 

얕잡아 보는 눈길한두 번 받은 것 아니니

울먹이다 그치고 하늘 한 번 우러르면 되지만

이렇게 자꾸 따라오는 좋은 달을 어찌하나

이 흥 깨고 나면 구만 리 밤길을 어이 갈까

이 길 다 가도록 헛생각 오래 탱탱했으면

이 길 다 가도록 헛생각 오래 밝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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