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이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규동, 북에서 온 어머님 편지
꿈에 네가 왔더라
스물세 살 때 훌쩍 떠난 네가
마흔일곱 살 나그네 되어
네가 왔더라
살아생전에 만나라도 보았으면
허구한 날 근심만 하던 네가 왔더라
너는 울기만 하더라
내 무릎에 머리를 묻고
한마디 말도 없이
어린애처럼 그저 울기만 하더라
목놓아 울기만 하더라
네가 어쩌면 그처럼 여위었느냐
멀고먼 날들을 죽지 않고 살아서
네가 날 찾아 정말 왔더라
너는 내게 말하더라
다신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눈물어린 두 눈이
그렇게 말하더라 말하더라
김사인, 지상의 방 한 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 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 칸이
망망 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 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김윤현, 노루귀
너를 오래 보고 있으면
숨소리는 작은 꽃잎이 될 듯도 싶다
너를 오래 오래 보고 있으면
귀는 열려 계곡 너머 돌돌 흐르는 물소리
다 들을 수 있을 듯도 싶다
아, 가지고 싶었던 것 다 가진 듯
내 마음 속에 등불 하나 환히 피어나
밤길을 걸을 듯도 하다
마음으로 잡고 싶었던 것들
이제는 다 놓아줄 것도 같다
너를 보고 있으면
이영옥, 마늘 한 접
베란다에 걸어 둔 마늘을 내렸다
이건 마늘 한 접의 무게가 아니다
육 쪽의 거푸집만 남아 버석인다
손만 닿아도 허물어지는 몸
이렇게 모든 것을 비워내기까지
마늘의 마음은 어땠을까
햇볕이 닿는 쪽으로
쭈볏쭈볏 길을 냈을 텐데
제 구실하지 못할 싹을 키우느라
갈급증과 싸우던 흔적이 노랗다
썩은 충치처럼 달그락거리던 마늘은
입관을 마치고 조용히 누워있다
저울위에 올려도 한 줌 먼지처럼
눈금 한 칸을 밀어내지 못한다
이건 시끄러운 삶이 모두 빠져 나가고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고요 한 접의 무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