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비가 와도 왔다가는
비가 와도 왔다가는 쉬어 가는데
죽음에서 삶을 그려내지 마라
눈이 왔다가도 쉽게 쉽게 떠나가는데
유한(有限)에서 무한(無限)을 그려내지 마라
가치 있는 것은 그냥 값진 것일 뿐
비교와 대조의 모사품은 아니니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죽음에서 삶을 그려내지 마라
유한(有限)에서 무한(無限)을 그려내지 마라
천도(天道)에서 인도(人道)로 바꾸지 마라
하상만, 작은 새의 발자국
작은 새가 꽃잎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갔다
바람은 불어서
바닥 위에 놓인 꽃을
어딘가로 몰고 가는데
발자국을 간직한 꽃잎만
날아가지 않는다
이파리를 떨다가
바닥에 그냥 붙어 있다
작은 새의 발자국이
꽃잎을 눌러 앉힌 것인데
작은 새는 가고 없다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꽃잎은 눌러앉아 있다
작은 새의 발자국을
지지대로 삼고서
이근일, 악어의 눈물
당신의 눈물 속엔 악어가 산다
악어는 꼬리를 휘둘러 그림자를 판다
익숙한 함정이지만
나는 늘 그것에 감응하여
메마른 그 그림자를 파 심연까지 내려간다
포개진 깊은 관계가 드리운
또 다른 그림자가 짙다
그 짙음 속에선 독이 철철 흘러나오고
독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난
마치 당신이 살짝 흘기는 농담인 양
그것을 받아 마신다
처참히 삼키고
또 삼켜지고 싶어
내 피톨에 가득 차오른 그 독으로
불가항력의 당신과
악어 사이를 찰나에 꿰뚫고 말리라
뒤늦게 당신은 눈물을 삼키려 애쓰지만
한껏 벌어진 악어의 입속을 향해
질주하는
치명적인 피는 이미 뜨겁게 들끓고
이영옥, 행방
어디에서 날아 왔는지
꽃잎 한 장이 방충망에 붙어 어깨를 떨고 있다
아무도 없는 여기서 한참이나 울었던 것 같다
저 슬픔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읽던 책 속으로 다시 시선을 내리는데
아까보다는 조금 더 위쪽으로 자리를 옮겨
눈물을 찍어대고 있다
꽃이 열매에게 제 자리를 내어줘야 할 때
어디로 뛰어 내려야 할지 도무지 방향을 알 수 없을 때
꽃이 고운 제 빛깔을 거두며 어두워지려할 때
옆에서 아무도 다독여 준 이가 없었구나
이쪽 철망에 걸러진 삶이
저쪽 철망으로 몸을 끼워 보지만
세상은 빈틈없이 촘촘한 봄날이었다
유치환, 바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哀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바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