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충성, 허물어버린 집
허물어버린 집이 요즘
꿈속에 나타나 온다
할머니 어머니가 사셨다
돌아가시고 나서
허물어버리면 안 될 집을 허물어버렸다
그 할머니 어머니 꿈속에 없어도
그 집이 꿈속에 나타나 온다
대추나무
감나무
당유자나무
산수국
매화나무
후피향나무
동백나무
채송화 몇 그루
저 멀리 혀 빼물고 헬레헬레
진돗개 진구가 나타나 온다
시간이 사라져 없는 풍경 속으로
오늘도 들어가 풍경을 바라보다가 나도
풍경이 된다 어느새
홍일표, 시계를 먹는 고양이
고양이는 너무 많은 시계를 먹었다
혹자는 인정 없는 주인 탓이라고도 한다
고양이는 시계와 함께
다량의 구름과 거친 바람도 복용하였다
때로는 고집 센 돌까지 깨물어먹기도 했다
고양이 배를 만져보면 초침과 분침이 만져진다
날카로운 슬픔을 용케 다스리고 있는 것
아무도 몰래 감추고 있다가
구석진 골목에 컥컥 뱉어놓기도 하는 것인데
그러다가 때론 혼자 눈물도 흘리는 것인데
마음에 박힌 가시뼈까지 소화시키던 고양이가
동그란 눈알의 불을 끄고 시계를 먹는다
적당히 우물거리다가 삼키는
동글동글 잘게 부서진 시계
시침 분침이 없는
손목시계보다 더 작은 시계
물렁물렁한 바람이 곧 고양이를 벗어놓고 달아날 것이라는 말이 있다
신철규, 당신의 벼랑
마지막 연락선이 바다에 몸을 맡긴다
천천히
박음질을 하며 나아가는 배
꽁무니에 하얀 실밥이 풀려나온다
갈매기들이 머뭇거리다가 선착장으로 돌아간다
너무 멀리 가면
돌아올 곳을 잃어버린다
빛과 어둠이 만든 붉은 주름이 조금씩 뒷걸음친다
실핏줄이 돋아난 바다
비문처럼 떠 있는 바지선들
고물이 들썩거릴 때마다 흔들리는 당신의 속눈썹
등대의 불빛이 검은 수평선을 향해 뻗어간다
등대의 밑은 어둡다
섬 뒤에 숨은 또 하나의 섬
당신 속에 가라앉는 또 하나의 당신
뒤돌아선 당신의 뒷모습이 벼랑 같다
벼랑의 뿌리를 핥는 파도가 하얗게 부서진다
우리는 너무 멀리 왔다
서로 밀어내며 좀 더 짙어졌을 뿐
속눈썹 위에 걸려 있는 말들이 파르르 떤다
반환점을 돌 때 우리는 잠시
포개졌다가 다시
멀어진다 마주잡은 손 틈으로
미세한 전율이 지나간다
우리가 실밥 같은 웃음을 주고받을 때
우리의 등 뒤로
먹구름들이 꿈틀대며 몸을 비빈다
장석주, 밥
귀 떨어진 개다리소반 위에
밥 한 그릇 받아놓고 생각한다
사람은 왜 밥을 먹는가
살려고 먹는다면 왜 사는가
한 그릇의 더운밥을 먹기 위하여
나는 몇 번이나 죄를 짓고
볓 번이나 자신을 속였는가
밥 한 그릇의 사슬에 매달려 있는 목숨
나는 굽히고 싶지 않은 머리를 조아리고
마음에 없는 말을 지껄이고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발을 들여놓고
잡고 싶지 않은 손을 잡고
정작 해야 할 말을 숨겼으며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했으며
잡고 싶은 손을 잡지 못했다
나는 왜 밥을 먹는가, 오늘
다시 생각하며 내가 마땅히 했어야 할 양심의 말들을
파기하고 또는 목구멍 속에 가두고
그 대가로 받았던 몇 번의 끼니에 대하여
부끄러워한다. 밥 한 그릇 앞에 놓고, 아아
나는 가롯 유다가 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한다. 밥 한 그릇에
나를 팔지 않기 위하여
최라라, 카메라 루시다
사진을 찍을 때는
사진이라는 생각에 눈 맞추지 말아요
굳이 무엇이든 봐야 한다면 당신을 보세요
한 시간 전쯤의 당신이면 어떨까요
금 간 거울 속 당신이나
깜빡 잊어버린 순간의 당신이라도 상관없어요
카메라는 가장 아름다운 당신을 향해
신호를 보낼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두 팔 꼭 붙일 건 없어요
지금은 슬픈 타조처럼 날개를 활짝 펼칠 때
사진 속 순간은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틈이니까요
거기엔 당신과 당신 사이가 들어 있답니다
웃으면서 흘렸던 눈물과
미안해, 사과부터 하고 싶던 생일날의 입술
혼자 먹는 밥상을 차리던 손끝
사진엔 그런 것들이 숨김없이 찍혀 있지요
참고로 나는 사진 찍을 때
그를 부른답니다 그 순간
한 시간 전의 내가 얼마나
환하게
따뜻하게
불려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