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종, 멀미
배가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바다가 흔들리는 것이다
바다가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흔들리는 것이다
세상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흔들리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흔들고 흔들리며 가는 것
뱃전을 붙들고 지나온 날들을 토악질하며
자꾸만 흐려지는 마음을
제 뺨 때려 일깨우며 가는 것이다
하상만, 우물
오후반에 가기 전 우물의 깊이를 측정했다
나는 돌을 집어 들었고
돌은 몇 번 벽에 부딪쳐 아득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때부터 깊은 것은 멀다고 생각하였다
시험지는 자꾸 물어왔다 나에게
관계가 깊은 것을 고르시오
나는 먼 것을 골랐고 어른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답을 교정하기 위해 학교에 남았고
안정된 직장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말할 수 없는 것을 가지게 된다
직원들에게 줄 모자라는 월급 백만 원을
아내에게 구해달라고 하지 못하는 선배는 아내와
약간은 먼 거리에 있다 걱정과 괴로움은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잠자리를 함께한 사이라도 멀다
우울한 날 함께 있는 것을 꺼리는 나의 이십 년
친구도 멀다
집에 대해 말해준 적이 없는
애인도 멀다
그들의 마음속엔 돌무덤이 있다
아직도 깊이를 재기 위해 누군가
고공낙하하고 있다 깊어만 갈 뿐
가까워지지 않는 그 속을
천양희, 새는 너를 눈뜨게 하고
이른 새벽
도도새가 울고 바람은 나무 쪽으로 휘어진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나 보다
가지가 떨리고 둥지가 찢어진다
숲에서는 나뭇잎마다 새의 세계가 있다
세계는 언제나 파괴 뒤에 오는 것
너도 알 것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남은 자의 고통은 자란다고 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렴
일과 일에 걸림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는 것이라고
저 나무들도 잎잎이 나부낀다
삶이 암중모색이다
가지가 찢어지게 달이 밝아도 세계는 그림자를 묻어버린다
일어서럼
멀리 보는 자는 스스로를 희생시켜 미래를 키우는 법이다
새의 칼깃 뒤에도 나는 자의 피가 묻어 있다
그러니 너는 네 하루를 다시 써라
쓰는 자의 눈으로 안 보이는 것은 없을 것이니
극복 못할 일이 어디에 있을라고
극복에도 바람은 있다
뛰어넘으려는 것이 너의 아픈 극복일 것이다
김은정, 포도
당신과 만나기 위해 나는 익어간다
순수 암반수를 찾아 지하로 지하로
문어발처럼 기어 내려간 천신만고 끝에
물어올리는 한 방울 또 한 방울
당신과 만나기 위해 나는
해와 만나고 바람과 손잡고 구름을 부양하고
비와 춤춘다
각 공정단계, 에스컬레이터는 바쁘고
봄이 오기도 전에 곁눈을 전정하고 중심 잡아둔
나의 균형 위에서 땡볕은 신랄할수록 복되구나
천 년 전에도 그러했을 것이
내 고뇌의 즙이 짙은 농도로 달콤해질 때까지
우주여 수작을 멈추지 마라
모든 열매는 전전긍긍의 성과다
이현승, 다정도 병인 양
왼 손등에 난 상처가
오른손의 존재를 일깨운다
한 손으로 다른 손목을 쥐고
병원으로 실려오는 자살기도자처럼
우리는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지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려놓고
아직 끝이 아니라고 위로하는 소설가처럼
삶은 늘 위로인지 경고인지 모를 손을 내민다
시작해보나마나 뻔한 실패를 향해 걸어가는
서른 두 살의 주인공에게도
울분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표정으로
밤낮없이 꽃등을 내단 봄 나무에게도
위로는 필요하다
눈물과 콧물과 침을 섞으면서 오열할 구석이
엎드린 등을 쓸어줄 어둠이 필요하다
왼손에게 오른손이 필요한 것처럼
오른손에게 왼손이 필요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