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준, 풍란
풍란의 뿌리를 만진 적이 있다
바람 속에 고스란히 드리운 풍란의 그것은
육식 짐승의 뼈처럼 희고 딱딱했다
나무등걸, 아니면 어느 절벽의 바위를 건너왔을까
가끔 내 전생이 궁금하기도 했다
잔뿌리 하나 뻗지 않은 길고 굵고 둥글고 단단한
공중부양으로 온통 내민 당당함이라니
언제 두 발을 땅에 묻고 기다려보았는가
저 풍란처럼 바람결에 맡겨보았는가
풍란의 뿌리로 인해 세상은 조금 더 멀어져갔지만
풍란으로 인해 얻은 것이 있다
한 평 땅이 없으면 어떠랴 길이 아닌들
나 이미 오래 흘러왔으므로
박형준, 어머니
낮에 나온 반달, 나를 업고
피투성이 자갈길을 건너온
뭉툭하고 둥근 발톱이
혼자 사는 변두리 아파트 창가에 걸려 있다
햐얗게 시간이 째깍째깍 흘러나가버린
낮에 잘못 나온 반달이여
임희구, 소주 한 병이 공짜
막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삶이 이렇게 난감해도 되는 것인가
날은 또 왜 이리 꾸물거리는가
막 피어나려는 싹수를
이렇게 싹둑 베어내도 되는 것인가
짧은 순간 만상이 교차한다
술을 끊으면 술과 함께 덩달아
끊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 한둘이 어디 그냥 한둘인가
세상에 술을 공짜로 준다는데
모질게 끊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있는가
불혹의 뚝심이 이리도 무거워서야
나는 얕고 얕아서 금방 무너질 것이란 걸
저 감자탕집이 이 세상이
훤히 날 꿰뚫게 보여줘야 한다
가자, 호락호락하게
신철규, 파브르의 여름
태양이 신작로를 핥는다
발을 디디면 움푹움푹 빠질 듯하다
한 아이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진다 팔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린다
한참을 엎드려 있다가 스스로 무릎을 털고 일어선다
검은 아스팔트 위에 남은
걸을 때마다 삑삑 소리가 나는
하늘색 샌들 한 짝
어릴 적 할머니는 신발을 사줄 때 신발 앞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러보곤 했다
신발은 발에 맞기도 전에 떨어졌다
낡은 소파 위에 팔을 괴고 눕는다
할머니의 베개에서는 늘 파마약 냄새가 났다
눈가에 주름이 많은 사람에게 눈길이 오래 머문다
잘 웃는 사람은 잘 울기도 한다
주름에 와서 주름으로 나가는 것
한참을 쪼그리고 누워 있다가 무릎을 펴자
무릎에서 우두둑 소리가 난다
오금에 새겨지는 주름
읍(揖)하듯 날개를 가지런히 모으고
나무에 매달려 있는 매미
자신의 몸을 떠오르게 했던 것이 어느새 명정(銘旌)이 되었다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듯
조심스럽게 떼어내 바지 주머니에 넣는다
가장 무더웠던 여름만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고영민, 슬픈 부리
제 짝이 죽자
먹지도 않고 몸의 깃털을
부리로 뽑아내던 앵무새 한 마리를
TV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다
몸에 꽂힌
깃털 수만큼의 슬픔아
늦가을, 용문사 앞뜰
제 부리로 노란 깃털을
무한정 뽑아내고 있는
저 늙은 은행나무의 짝은
누구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