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화전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이 여름, 깊은 가뭄으로 흠뻑 말라 있으니
와서, 와서들 화전하여라
나의 후회들 화력 좋을 터
내 부끄러움들 오래 불에 탈 터
나의 그 많던 그 희망들 기름진 재가 될 터
와서, 장구 북 꽹과리 징 치며
불, 불 질러라, 불질러 한 몇 년 살아라
한때 나의 모든 사랑, 화전이었으니
그대와 만난 자리 늘 까맣게 타버렸으니
서툴고 성급해 거두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숲을 찾았으니
이제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와서 불 질러라, 불
이경림, 모래들
그 밤, 나는 바닷가 모래 위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별들이 모래알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모래들은 가만히 있었다
조개껍질 깨진 병조각 말라비틀어진 해초들도 가만히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그것이 일 년 전의 바람인지 천 년 전의 바람인지 알지 못했다
김경호, 몸
살아갈수록
상처에 손이 간다
손톱이 자라는 동안
왜 손금이 가려운지
새벽녘에 들어보는
늙은 레코드처럼
내 몸은 지지직거리는
유한반복의 날들
어제를 견디어 온
저 벽면의
수직 빗물자국
길게 흘러내리는
새벽
살아갈수록
상처가 가렵다
낫지 않는 깨진 상처 위에
푸른 별이 돋는다
김사인, 꽃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새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김해화, 길 위에서
당신이 떠난 뒤로 오래 걸어왔다
길 끝이 없다
나는 그때 절망을 선택한 것이다
저기 환한 언덕 넘어가지 않겠다
길 아래 흐르는 물에 발 담그고 쉬지 않겠다
산모퉁이 돌아가는 당신 이름 부르지 않겠다
나는 그냥
길 위에 누워 길이 되어야 겠다
그러라고 달이 밝으네
나는 지금 절망을 선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