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나무가 그랬다
비바람 치는 나무 아래서
찢어진 생가지를 어루만지며
이 또한 지나갈 거야 울먹이자
나무가 그랬다
정직하게 맞아야 지나간다고
뿌리까지 흔들리며 지나간다고
시간은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고
이렇게 무언가를 데려가고
다시 무언가를 데려온다고
좋은 때도 나쁜 때도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 게 아니라고
뼛속까지 새기며 지나가는 거라고
비바람 치는 산길에서
나무가 그랬다
나무가 그랬다
이수익, 새
한 마리의 새가
공중을 날기 위해서는
바람 속에 부대끼며 뿌려야 할
수많은 열량들이 그 가슴에
늘 충전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보라,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들은
노래로써 그들의 평화를 구가하지만
그 조그만 몸의 내부의 장기들은
모터처럼 계속 움직이면서
순간의 비상 이륙을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오, 하얀 달걀처럼 따스한 네 몸이 품어야 하는
깃털 속의 슬픈 두근거림이여
김종해, 가을길
한로 지난 바람이 홀로 희다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지는 가을
서오릉 언덕 너머
희고 슬픈 것이 길 위에 가득하다
굴참나무에서 내려온 가을산도
모자를 털고 있다
안녕, 잘 있거라
길을 지우고 세상을 지우고 제 그림자를 지우며
혼자 가는 가을길
서안나, 그림자, 나는
나는 등 뒤에서 더 선명하다
당신의 뒤편인, 나는
당신 뒤꿈치에 밟혀
꽃처럼 사납게 피어나는, 나는
없어서 있는, 나는
당신에게 훌쩍 뛰어들기도 하는, 나는
당신보다 한걸음 늦고 한걸음 빨라
늦어서 빠른, 나는
당신을 쫓거나 도망자인, 나는
태양의 비명이 들리는, 나는
기침처럼 당신을 찢고 나온, 나는
빛의 단검으로 당신을 내려치기도 하는, 나는
뒤쪽으로도 잘 자라는, 나는
박형준, 가는 비
남의 집 빌라
현관 앞에 쭈그리고 앉아
가로등을 바라본다
그물 모양으로 내리는 비
걸리는 거라고는
가로등에 걸린
거미집밖에 없는데
이 밤 하늘 끝에서
누가 세상을 향해
투망을 던진다
비는 밤새 환하다
그 안에 잠시 나비가 걸려 있다